영화 리뷰 [너의 이름은]
1월 4일 [너의 이름은]이 개봉했다. 일본에서 선개봉 후 한국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역대 2위에 이름을 올리며 화려하게 감독의 이름을 알렸다. 신카이 마코토는 빛의 마법사, '작화 깡패' 등 '눈부신' 영상미를 강조하는 별명이 많은 감독이다. [너의 이름은]은 또한 [언어의 정원]만큼이나 혹은 더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여러 사람들이 [너의 이름은]이 인생영화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자는 인생영화는 아니더라도 재미있게 관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룰 [너의 이름은]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나는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의 이중성과 이 영화가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자니 이 글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너의 이름은]은 '이름'에 대한 호소와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호소로 가득하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에겐 마땅히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애니 영화를 보며 불현듯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아마도 두 번째 '혜성'을 보면서이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혜성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갈라져서 떨어지는 혜성의 모습에서 '핵폭탄'의 이미지를 보았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는지도 모르게, 나는 그 이미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불쾌하게 흘러갔다. 나는 영화를 되돌려보며 왜 '핵폭탄의 이미지'를 보았는지에 대해 상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갈라지는 혜성의 이미지는 전투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이미지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2. 폭발하는 혜성의 파편이 떨어지는 장면, 혜성이 날아가는 장면 등 혜성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폭탄과 전투기를 떠올리게 한다.
3. 영화의 곳곳의 소재, 소품, 장소 등이 '미국'을 향하는 것이 많다.
'1. 갈라지는 혜성의 이미지는 전투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이미지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를 먼저 살펴보자. 혜성은 [너의 이름은]이 이용하는 영화의 주요 소재이다. 미츠하의 동네 위를 지나가던 이 혜성에서 갈라진 파편이 마을 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미츠하의 동네는 '파괴' 당하고 만다.
혜성은 처음부터 떨어지면서 갈라지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영화의 시작부터 구름들을 가르며 떨어지는 카메라 무빙이 사용된다. 이 '낙하'하는 혜성의 파편은 푸른빛의 다른 혜성 조각들과는 달리 붉게 타오른다. 나는 옆의 사진에서 혜성이 폭격기로 그리고 다른 푸른빛 파편들이 전투기로 그리고 파편이 폭탄으로 보였다. 전투기의 '형상'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여럿 그어진 직선들, 그리고 하나 떨어지고 있는 곡선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에 옆 사진에서 마치 도시로 떨어지는 듯한 폭탄의 이미지(인상)를 받았다.(그리고 이 장면에서 타키의 대사는 "아름다워"이다.)
그리고 '2. 폭발하는 혜성의 파편이 떨어지는 장면, 혜성이 날아가는 장면 등 혜성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폭탄과 전투기를 떠올리게 한다.'를 이어서 말해야 할듯하다. 혜성의 파편이 미츠하의 마을에 떨어져 폭발하는 장면은 단 한 번만이 나온다. 그리고 그 한 번의 폭발 장면은 폭탄의 폭발 장면과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혜성이 날아가는 여러 장면들, 위의 사진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이 혜성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들이 있다. 이런 장면들은 흔히 전쟁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샷이다. 멀리 날아가는 전투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여러 전쟁 영화에서 본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이러한 이미지들을 '차용'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은연중에,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감정을 유발하거나 무언가를 떠올리도록 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런 이미지를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위기의식'(핵폭탄에 대한 거부반응)과 '동정의 감정'(다수의 죽음)을 주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3. 영화의 곳곳의 소재, 소품, 장소 등이 '미국'을 향하는 것이 많다.'와 함께 봐야 할 문제이다.
영화의 곳곳에서 미국의 문화적인 부분이 많이 묘사된다. 특히 타키가 머무르고 있는 도쿄에서 묘사되는 여러 장면들에서 나타난다. 타키의 몸을 빌린 미츠하가 사용하는 핸드폰은 '아이폰'이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사람들은 타키에게 '양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말미에 묘사된 카페의 상호명은(비 오는 거리에 상호명이 비쳤던 장면) 초록색이고 영어였으며, 이는 '스타벅스'가 아닐까 한다. 타키가 살고 있는 도쿄의 삶은 여러 도시적인 문화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속의 곳곳에는 미국 문화의 유입을 묘사하고 있다.
비단 이런 미국적인 문화의 묘사가 어떤 반미주의와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바는 아니다. 주목한 것은 이런 문화적 생산물의 묘사뿐 아니라 대조의 방식이다. 타키가 살고 있는 도쿄의 삶은 미츠하가 살고 있는 시골의 삶과 대조되며 도시문화와 전통문화의 경계를 나눈다. 미츠하는 일본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신사의 딸이다. 오래된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미츠하가 그의 동네에서 살고 있는 시간대는 타키의 시간대보다 과거이다. 나에게 이 대조는 영화가 마치 다음과 같이 보이게 했다.
과거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여성에게 폭탄(혜성의 재난)이 떨어지는 것을 현재의 현대문화(미국적 문화가 유입된)를 살고 있는 남성이 '잊지 않고' 구해내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영화는 재난의 이야기를 싹둑 잘라낸다. 그저 과거의 이미지, 신문의 기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기적적인 구조와 생존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신세카이류'의 방식으로 잘려나간다. '신비'롭고도 따분한 방식을 들이댈 뿐이다. 소년소녀의 사랑의 이어짐으로 세계의 재난은 사라진다. 그리고 혜성은 그저 재난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설정으로 기능한다. 혜성에 의해 희생되었던(희생될뻔했던) 마을 사람들은 '기적적 구조'로 단순 서술된다. 영화는 낙하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시작하지만 낙하 이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소년소녀의 사랑을 위해 재난의 이야기를 절단한다. 대조된 두 공간 중 하나, 미츠하의 공간은 이야기를 상실한다.
이러한 이야기의 절단은 무기력함으로 흐른다. 절단된 재난의 이야기는 오직 이용당할 뿐이다. 재난에 의해 희생된(될뻔한) 수많은 사람들은 다시 외면당한다. 두 주인공은 서로를 오가며 우연히 알게 된 과거와 그 과거의 재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슬로건으로 가득 채운다. 반복되는 서사의 중심,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오직 미츠하에게 던지는 슬로건이 되어버린다. 혜성의 이미지는 그저 '아름다움'이나 '극한의 인연을 위한 소재'정도로 치부된다. 이 이미지는 그저 소비된다. 원자폭탄의 이미지 위를 뒤엎은 혜성은 시각적 영향을 극대화하는 것에 이용되고 소멸해버린다.
혜성의 소멸과 동시에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은 오직 소년과 소녀의 연결로 방향을 돌린다. 혜성, 폭발로 죽는 마을 사람들, 미츠하의 가족, 친구들의 존재 또한 잘려 나간다. 혜성의 파편이 소멸함과 동시에 미츠하가 근거를 이루던 공간은 사라진다. 신비로운 '전통의 방식'으로 구해진 미츠하의 공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공간에 대한 서술이 소멸한 미츠하는 타키의 공간으로 유입된다. 오직 미츠하만이 현대적인(미국적인) 공간에서 떠돈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미츠하는 마지막으로 남은 전통의 수호자다. 마지막 장면, 계단에서 주인공들이 만나는 장면에서 재난의 서사는 그대로 반복된다.
계단을 오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타키와 계단을 내려가다 올려다보는 미츠하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전히 현대 문화에 살고 있던 타키는 미츠하와 이어진다, 억압적 방식으로. 영화의 결말 시퀀스를 책임지던 타키의 서사는 우연히 만난 미츠하의 만남으로 귀결된다. 타키는 미츠하를 내려다본다. 타키의 공간에 유입된 미츠하는 타키를 올려다본다. 타키에 의해 미츠하는 현대의 공간에서 존재할 이유를 찾는다. 이런 '남성-주체'적인 서사는 영화를 관통하여 흐른다. 어머니가 없는 타키와 미츠하에게 보이는 건 아버지의 모습들이다. 타키는 미츠하를 재난에서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다. 오직 타키에 의해서만 미츠하는 다시 '구원' 받는다.
구태여 등장하는, 미국산 양식들이 가득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주인공 타키는 '구원자'의 위치에 있다. '구원자'인 타키에게 여성의 몸은 '희락 거리'거나 신기함의 대상이다. 반면 미츠하에게 남성의 몸은 부끄러워하는 것이자 동경하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남녀는 서로의 몸을 통해 말싸움을 이어나간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싸움의 갈등은 교차된 몸을 통해 수행된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한 방향의 주체성을 확립한다.
'남성-주체'의 서사에서 미츠하와 미츠하가 가진 공간은 어머니의 역할을 떠맡는다. 미츠하는 재난의 시기에는 주체적 활동(마을을 구해내려는)을 하지만 실패하고 결말의 시기에서 타키의 공간에 유입된 것으로 남는다. '남성-주체'에서 미츠하는 '구해지는' 것이자 또한 남성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보완재로써 기능한다. 무기력한 미츠하의 모습은 마찬가지로 재난에 대해 무기력한 서사와 연결된다. 미츠하의 공간, 혜성이 떨어진 공간, 사건은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성-주체의 사랑을 위해 소비되는 소재에 불과한 위치에 이른다.
다시 말해 재난의 서사는 오직 소년의 사랑을 위해 기능한다. 한없이 '아름다운' 혜성의 모습은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자 동시에 비극적인 사건을 야기하는 거대한 재난의 역할을 맡는다. 만약 [너의 이름은]에서 차용한 것이 원자폭탄의 이미지라면 혜성의 이미지는 한층 극적으로 변모한다. 원자폭탄의 이미지가 가져올 수 있는 이미지적-감정(피해자의 이미지, 불쾌감, 위기의식, 동정)을 이끌어냄으로써 소년의 사랑에 기여한다. '아름답던' 혜성의 극적인 폭발, 죽음과 생존을 가르는 사건, 구원의 서사는 소년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만다. 끔찍한 폭탄의 사건은 이 영화에서 도구적-재난의 형태로 소비된다.
[너의 이름은]은 '신세카이계'식의 서사, 거대한 세계에 관한 재난의 묘사를 끌어들이면서 그것에 대해 무기력한 책임을 내보인다. 거대한 이미지의 감정을 끌어다 '소년이 가진 사랑의 크기'가 마치 그것인 마냥 착각하도록 한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이 가진 끔찍한 사건의 서사를 단순히 이용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고 해소하는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서사의 절단은 무기력한 대응에 불과하다.
어쩌면 혹자는 이런 해석들이 [너의 이름은]에 대한 어떤 악의를 표하려고 하는 것인지 물을 수도 있겠다.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다'. 나는 다만, 영화를 보고서 나 또한 시각적 화려함에 매혹되었으나 왜 '불쾌함'이 남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아름다운 영상미의 사랑의 이야기'로 남는 것보다 다른 관점으로 봄으로써 생각을 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너의 이름은]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적어도, 소년의 사랑이 오직 세상을 구원할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