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보통 '힐링'이라고 생각하면 채워주는 무언가를 생각하기 쉽다. 가령 '당 떨어지는 상황'을 위한 달달한 케이크라던가. 진득한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채워 넣던가 하는 것을 보자면 말이다. '힐링'은 곧 채워 넣기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동의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마담 프루스트가 알려주는 비법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실뱅 쇼메 감독이 그의 전작 애니메이션들에서 보여준 쓸쓸함이 묻어나서일까. 2017년의 3월, 마담을 다시 만나보았다.
마담의 '힐링'은 고통스럽다. '힐링'이 고통스럽다니. 총천연색이 가득한 영상미로 잔뜩 무장한 화면들에 담긴 정서는 다소 진중하고 무겁다. 역설적이게도 폴이 마담을 통해 알게 되거나 알아나가는 것들은 폴을 힘들게 한다. 폴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고 지내다가 상기하기 시작한다. 폴이 짧게나마 기억하던 것은 무섭고 두려운 아버지의 존재다. 웃옷을 벗고 강렬한 이미지로 비치는 아틸라의 중압감은 당시 어린 폴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을 것이다. 혹은 다른 문제가 있거나.
마담이 폴을 돕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단지 기억들에 다가가도록,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담은 폴에게 휴식을 준다거나 좋은 기억들을 채워 넣지 않는다. 마담은 폴이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것들을 다시 만나는 자리를 마련할 뿐이다. 마담의 '힐링'은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문제를 지각하고 그 문제를 직면하고 문제의 진실을 풀어나가는 것이 마담의 방법이자 마담이 폴에게 해주는 '힐링'의 방법이다. 마담의 방식에 따라 폴은 흔들리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연출적으로 감동적인 부분은 폴이 마지막 기억을 떠올릴 때이다. 피아노가 떨어져 부모가 죽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데, 그전까지 마치 환상처럼 흐릿한 아이의 눈으로 보던 기억이 완전히 환상 속으로 파묻힌다.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노래가 흐르고 노래를 하는 가수가 등장한다. 기억 안에서 현실과 환상이 극렬히 교차하는 순간, 피아노가 떨어진다. 기억의 행복감이 절정에 이를 때 놀랍게도 절망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폴의 상황을 납득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 폴의 급박한 고통을 이해하고 폴의 마음을 따르고 그 비극성에 설득된다.
폴은 이런 고통을 딛고 일어난다. 그것은 아픔의 과정들을 모두 거친 후에서야 가능하다. 피아노를 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고 떠나간 마담의 빈자리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폴은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써나 가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진정한 사랑의 모습으로 보이길 바라며 아이에게 환히 웃어 보인다. 처음과 끝을 이어주면서 폴의 변화를 명확히 설명하는 이 장면들로 영화는 매듭을 짓는다. 이런 연출의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폴의 마음을 따라 마담의 공간을 여행한다. 마음들은 마담의 공간에서 풀어지고 축 늘어진다. 이 '늘어짐'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할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힐링'을 만나게 되는 공간인 것이다.
직면하고 위로받는 것, 결국 자신이 받은 상처를 다시 상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다. 멀끔한 옷에 가려진 흉터는 보이지 않는다. 흉터를 더듬으며 상처를 기억하고 상처 받았던 때를 기억하고 기억의 얼룩을 되돌려놓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마담은 단지 그것을 돕는 것이다. 마담의 '힐링'은 무언가를 부여하거나 주는 게 아니라 바로잡는 것이다.
마담의 집으로 갈 때 폴이 잠시 어두운 벽면을 따라 걷는 장면이 나온다. 어두운 벽을 더듬으며 걸어 들어가는 통로부터 우리는 숨겨진 '마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들어가니 빛이 가득한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온갖 채소들이 가득하다. 아파트에 채소밭이 있는 이색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아름답고도 이색적인 환상의 공간이다. 비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기에 이만한 곳이 있을까.
폴은 기억으로의 여행을 떠날 때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환상에 빠져든다. 이 장면들이 이 영화의 매력이 폭발하는 곳이 아닐까. 폴의 '눈 연기'가 극대화되는 지점이자 동시에 감독의 질문을 던지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폴은 두 눈을 뜬 채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을 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왜 부릅 떴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억을 직면하는 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두 눈을 부릅뜨고 온 힘을 다해 상처 받았던 기억을 만나는 것이다.
이 '힐링'을 통해 폴은 성장한다. 유년기의 끝자락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 자리한다. 폴은 그랜드 피아노에서 식물들을 기르고 우쿨렐레를 연주한다.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만연하다. 극의 후반부에서는 행복감이 차오른다. 일상은 새롭게 덧씌워진다. 폴의 행복은 보는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어느새 화면 한가득 웃고 있는 그를 보며 같이 웃고 있는 나의 웃음으로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를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