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미스 슬로운]
정치의 세계는 얼마나 치열하고 나아가 추악한가. [미스 슬로운]은 로비스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로비스트들은 자신이 맡은 법안의 통과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의원들을 압박한다. 그들은 미국 전역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밤낮없이 승리를 위한 전략을 구상한다. 그런 쟁쟁한 로비스트들 사이에서도 '슬로운'은 홀로 당당히 선 독보적인 존재이다. [미스 슬로운]이란 제목처럼 이 영화는 '슬로운'이란 사람에 온갖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슬로운은 험난한 로비스트의 길을 완벽하게 주행해 나가는 놀라운 솜씨의 운전사다.
슬로운은 총기 규제 법안이 발의되면서 자신이 있던 로비 회사에서 다른 경쟁 로비 회사로 이적한다. 그의 치밀하고 우악스럽기까지 한 계획은 확실히 상대방을 완전히 휘어 감는다. 첫 장면에서 슬로운이 읊조리는 로비스트의 성공전략을 그 스스로 완벽히 재현해 낸다. 무게추가 상대방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할 때쯤엔 항상 그의 한 수가 상황을 뒤흔든다. 슬로운은 누구보다 앞서서 이 정치적 쟁투의 방향을 바꾸어 나간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튼튼한 각본이다. [미스 슬로운]의 각본은 확실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제시한다. 로비의 세계라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칼보다 예리하고 총보다 포악한 것들을 상대를 향해 겨눈다. 슬로운은 마치 전쟁 영웅처럼 전장을 홀로 장악한다. 모든 전투는 그의 전략 안에서 이루어진다. 승리에 대한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지속적으로 상황을 뒤집어 나가는 이야기는 슬로운의 철두철미함으로 장식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슬로운의 이름을 내세우는 이유다.
그러나 영화는 안타깝게도 만들어진 각본을 따라가는 것에 그친다. 수없이 많은 대사와 대사 속의 전문용어들은 아무런 시각적 효과 없이 그저 대사로 제시된다. 로비 세계가 익숙하지 않고, 정치적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대사에 빠져들기가 힘들다. 또한 중심 서사에서 벗어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그저 대사로 설명되거나 가려진다. 영화는 서사를 따라잡기에 급급하고 그것이 보여주고자 하는 연출적 의도나 확신이 없이 흘러간다. 겨우겨우 대사와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는, 거칠게 말하자면, 잘 짜인 드라마를 2시간으로 압축해 놓은 듯했다.
영화는 충실히 관객들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뜬금없이 새 동료와 밥을 먹는 장면이라던가, 차에서 밀회를 나누는 의원들 뒤로 보이는 검은 차를 보여주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다. 이 '굳이' 보여주는 장면이 은연중에 관객이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았다면 모르겠지만, 장면들의 연속성을 깨면서까지 제시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차에서 밀회를 나누는 두 의원의 심리전이 앞선 로비스트들의 심리전보다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다. 다소 일방적인 상황이고 그 상황에서 그렇게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힘든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의원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려면 정확히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긴장을 스펄링 의원의 찝찝한 얼굴로만 남겨두고 그 장면을 떠난다. 그리고 '굳이' 배경을 찍는 장면을 삽입하고 정보를 제공한다.
연출은 섬세하게 이야기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묘사하는 것에 그친다. 극의 진행을 보여주기에 바쁘다. 이런 부분들은 다소 딱딱하게 제시될 뿐이다. 슬로운의 감정이나 심리 묘사가 주가 되는 장면도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진 채 보여준다. 감독은 슬로운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서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미스 슬로운]은 슬로운의 활약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캐릭터, 굵직한 서사에서 꽤나 흥미로운 영화다. 그러나 영화의 포스터에 붙은 소개 문구 '정치 스릴러'로써의 매력은 부족해 보인다. 서사의 굵직함 뒤에 숨겨진 헐거운 장치들을 숨기는 화려한 언변은 영화의 초반을 지루하게 만들어 버린다. 점점 서사가 전개되면서 용어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스릴러'는 이해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다. '정치' 또한 그러하다. 관객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치열한 두뇌싸움과 그것의 결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희열을 보고 싶었다.
[미스 슬로운]이 담아내는 것은 담담한 시선에 담긴 정치 드라마이다. 이 영화는 두뇌 싸움 조금, 슬로운의 드라마적 감정이 조금, 현실에 대한 비판이 조금 섞인듯한 애매한 장르를 표방한다. 화려한 용어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상황으로 제시하는 것이 어땠을까. 애매한 공기가 영화의 전반을 타고 흐른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뚝심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야기의 설득력마저도 표류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