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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Mar 10. 2017

은연히 깔린 의식에 대항하여.

영화 리뷰 [쇼콜라]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름'에는 강력한 생각들이 묶여있다. 친구의 별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는 '엄마'라는 단어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름'을 통해 우리는 관계를 기억 속에 남겨둔다. 그래서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관계의 시작이자 끝이다. 어쩌면 유치한 별명들과 이름 짓기는 마냥 아이들 장난으로, 쉽게 받아들일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즐거운 농담이지만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코아나 초콜릿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쇼콜라'는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광대, 라파엘 파디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나온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서 만나봤던 라파엘 파디야는 실존했던 흑인 광대이다. 그는 1900년대 전후의 '좋은 시대', 벨 에포크를 살았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문화와 예술이 번창하던 아름다운 시대에 그는 '예술가'이자 '광대'였다. 영화 [쇼콜라]는 파디야의 삶을 따라다닌다. 마치 전기영화처럼 파디야가 조르주를 만난 때부터 파디야가 죽을 때까지 그의 일생에 대해 다룬다.

 [쇼콜라]는 놀랍게도 광대를 소재로 하는 영화지만 웃기지 않다. 광대 공연을 하는 장면들, 사람들이 웃는 장면들까지 나오지만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다. 그들은 영화 속의 관객 웃기기에 성공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 웃기기엔 실패한다. 공연하는 파디야와 푸티트의 모습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오히려 긴박하고 위기감 있는 화면을 만들어 낸다. 광대였던 그들의 삶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영화는 광대의 삶을 지켜보도록 만든다.

 파디야는 식인종 연기를 하는 '우탕가'에서  '라파엘 파디야'로 연극을 하기까지 성장해나간다. 성장 과정에서 파디야는 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그를 '우탕가', '쇼콜라', '라파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서커스단의 단장들, 진정한 광대가 되고 싶었던 조르주 푸티트, 파디야를 사랑한 마리까지. 파디야는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게 된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파디야가 가진 광대의 모습과 성장의 시간이다. 이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가 남는 장면이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광대 공연 중에 파디야가 자신을 때리는 푸티트의 손을 막고 푸티트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쇼콜라'였고 '항상 맞아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파디야가 공연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푸티트의 뺨을 때린다.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인종차별은 만연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파리의 서커스 단장은 파디야에게 "내가 너를 시궁창에서 꺼냈는데!"라고 소리친다. 식민지 박람회에선 같은 인간을 울타리에 가둬두고 관람한다. 파디야를 잡아간 경찰들은 파디야의 등이 찢기도록 솔질을 하며 '표백'한다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의 국가 프랑스에서 예술, 문화적으로 융성하던 '벨 에포크' 시대에도, 흑인은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발길질당하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다. 영화 안의 백인들에게 흑인은 '우탕가'이자 '곰보다 키우기 쉬운' 전시 상품 혹은 '하위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파디야가 푸티트의 뺨을 날릴 때에 이런 '당연한' 상황이 깨어지고 관람객들은 당혹해한다.

 관람객들은 '쇼콜라'가 맞는 장면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전개되고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파디야가 너스레를 떨자 관람객들이 다시 웃는다.  '다만 공연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줄 때에야,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 때 관람객들은 안심한다. 그들은 이것이 그저 광대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오늘 밤을 위한 '반전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로 조용히 조르주에게 파디야가 하는 대사는 이 모든 것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봐, 반대로 해도 되잖아?"

 다른 장면은 파디야의 오셀로 초연이 끝나는 장면이다. 진짜 흑인 배우가 오셀로 역을 훌륭하게 해냈지만 사람들은 그 연극을 비난한다. 파디야와 함께한 연극단장과 마리는 파디야가 극복한 과정, 그의 노력과 그 결과물에 찬사를 보내지만 다른 연극의 관람객들은 연극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영화에서 관람객들의 반응은 '일반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비추자면 이 장면은 타인종에 대한 거부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서커스 공연 중 백스테이지에서 파디야에게 말을 걸던 백인 광대 동료의 말처럼 말이다. "이방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겠군."

 파디야는 이방인이다. 그는 연극단에 가득한 백인이 아닌 흑인이기 때문이다. 흑인이 흑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던 시대다. 오셀로의 흑인 역할마저 백인이 분장을 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흑인이 흑인 역할을 하는 이 '알맞음'은 관람객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흑인은 그 자체로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연극이라는 '높은' 사회 계층이 보는 문화생활에서 이방인은 완연히 거부당한다. 이방인인 파디야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과정에서 관람객들의 반응은 점점 거세진다. 다만 파디야를 동등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 연극단장, 마리만이 박수를 칠 뿐이다.

 거부와 비슷한 맥락으로 도박장의 사람들과 파디야의 관계 또한 주요하다. 연극 공연 후 파디야는 빚쟁이들에 쫓겨 두들겨 맞는다.  파디야는 백인들의 공동체로 편입되는 과정, 프랑스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광대로 성공하지만 그의 성공은 '타락'으로 전락한다. 그는 사치스러운 차를 타고 술과 마약을 한다. 도박장 백인들은 파디야의 욕망을 이용해 그를 '노예화'한다. 이는 우연히도, 그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과정을 저지하게 된다. 파디야가 공동체에 편입되는 과정, 그것도 공동체의 대부분이 생각하는 '인간'의 지위까지 가는 과정은 저지로 인해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파디야는 유명한 광대였지만 여전히 전시품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가 전시품을 넘어 인간의 지위를 찾고자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자 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거부당한다. 이런 그를 마지막에 받아들이는 것은 상생해야 함을 깨달은 푸티트다. 푸티트는 광대 공연을 할 때 파디야는 자신의 극에서 공연하는 일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기획과 극이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공연에서 파디야든 푸티트든 둘이 함께해야 있을 수 있던 공연이었다. 임종에 가까운 '라파엘'에게 늦은 깨달음에 대한 사과를 건네며 영화는 끝이 난다. 지붕 위 창으로 보이는, 마치 관에 누운듯한 파디야의 모습과 그의 손을 잡은 푸티트의 모습은 이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 글은 아트나인 카페에 등재된 글입니다.

http://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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