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단지 세상의 끝]
'격동하는 감정들의 혼재'라는 짧은 평에 이 영화를 담을 수 있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이 짧은 첫인상은 '격동', '감정', '혼재'라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단어들로만 가득하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6번째 장편 영화를 만나며 내가 느낀 것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인가. 내가 [단지 세상의 끝]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오직 '강한 빛을 보고 남은 잔상' 같은 것이 남았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영화의 여운을 되돌려 보았다. 아니 멱살 잡힌 채 끌려간 90분을 상기해 보았다. 우선 숨을 고르고서, 빠르게 지나간 영화의 부분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불가능했다. 90분, 총 러닝타임 99분의 이 영화에서 쏟아지듯 나오는 대사들과 수많은 클로즈업 장면들을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영화가 내비친 인상의 흐름을 다시 따라가기로 했다.
먼저 '혼재'를 살펴보기 위해 영화의 공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혼재한 무언가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루이가 공항에 내려 집으로 가는 장면들로 시작하고 루이가 집에서 나오며 끝난다. [단지 세상의 끝]은 집에 머무르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혼재'는 집이라는 공간에 있다. 루이는 집에 들어오면서 가족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눈다. 이때 관객은 루이가 택시를 타고 오며 이야기했던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한다.
이 이야기에서 자비에 돌란 감독은 집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평소에 집이라는 공간은 밝고 따뜻한 곳, 편안한 곳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단지 세상의 끝]에서 집은 세상의 끝에 다를 바 없는 곳이다. '혼재'가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이자 마냥 밝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루이를 맞아 밖에서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온갖 치장을 한다. 이 영화에서 루이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이에게 가족은 '친숙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반대의 입장에서, 가족들에게 루이는 집 안이 아닌 집 밖에 있는 사람인것처럼.
이 불편한 이야기는 그리도 어색하게 나누는 가족들의 대화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루이는 카트린과의 밀담을 시작으로 어머니, 쉬잔, 앙투안과 함께 밀담을 나눈다. 그 외에,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지극히도 짧다. 이는 두 번째 핵심,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가족이 모두 모여서 나누는 대화에서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드러난다. 다시 루이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을 돌이켜보자면 먼저 쉬잔과 카트린이 루이를 맞이하고 다음엔 어머니, 그리고 앙투안의 순서로 루이와 인사를 한다. 밀담의 순서 또한 이런 감정적 거리를 따라간다.
영화의 제목이 등장하는 씬을 보자. 앙투안과 루이가 차를 타고 외출하던 중 둘은 말다툼을 하게 된다. 집으로 오면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루이에게 앙투안은 듣고 싶지 않다며 화를 낸다. 대화를 끊었던 앙투안은 루이에게 돌연 다시 말해보라고 한다. 자신에게 호통 치던 앙투안에게 화가 난 루이는 "가는 길이 가깝잖아. 여기가 세상의 끝도 아닌데 왜 이래?"라고 하며 대화를 끊어버린다. 여기서 '세상의 끝'은 집에 대한 생각이다. 위태로운 곳, 한치도 알 수 없는 곳인 '세상의 끝'은 집과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앙투안과 루이가 갖고 있는 심리적 거리이다. 앙투안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루이에게서 가장 먼 곳에 있다.
루이의 태생은 집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과 같다. 루이가 집에 오고서 나누는 밀담 또한 '세상의 끝'으로 가는 여정처럼 보인다. 집 밖에서 온, 집에서 가장 바깥에 있는 사람, 카트린부터 루이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앙투안까지의 여정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밀담에서 동시에 루이는 각각의 '세상의 끝'으로 가는 여정을 거친다. 타인의 중심, 온전한 이해가 루이에겐 '세상의 끝'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루이의 여정은 항상 실패하고 만다. 앙투안과 외출을 다녀온 루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집 안이 아닌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이제 '격동'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 '세상의 끝'을 맞으며 보는 감정은 서로를 바라보며 폭발한다. 자비에 돌란은 가족이라는, 애정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사실 편하지 않은 관계의 모습을 헤집어놓는다. 루이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털어놓고자 하지만 끝내 그것에는 실패한다. 앙투안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밀담이, 루이의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여정이 실패했듯 말이다. 이 짧은 여정에서 감정은 소용돌이친다. 사랑, 질투, 관용, 시기가 뒤섞인 채 서로를 향해 흐른다. 어머니는 루이에게 말한다. "이해는 못 해 그러나 널 사랑해"
[단지 세상의 끝]을 보고서 느낀 '멱살 잡힌 듯한 답답함' 혹은 '격정적인 감동의 소용돌이'를 이끄는 것은 이 부분이다. 루이는 영화 내내 혼재한 감정을 오간다. 그리고 이 감정은 폭발하지 못한 채, 해소되지 못한 채 고조만을 지속한다. 마지막, 앙투안의 주먹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감정은 끊임없이 떨리며 고조된다. 그리고 루이의 말이 전해지지 못했듯, 앙투안의 주먹을 날리지 못했듯 가족에 대한 루이의 감정은 폭발과 해소 직전에 멈추어 버린다. 영화의 감정은 '폭발과 해소'를 시키지 않은 채 그 선 바로 앞까지 끊임없이 '격동'한다.
[단지 세상의 끝]은 클로즈 업과 수많은 대사들로 가득하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러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최선의 '공연'이었다. 과도하리만큼 많은 클로즈업은 오히려 영화 감정과 배우들의 연기를 놓치지 않게 하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비에 돌란 감독은 또한 음악이라는 요소를 직접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다. OST는 영화의 이야기를 하듯 선곡되어 있고 '뜬금없이' 던져지는 음악은 너무나 장면들과 잘 맞아떨어진다. 노래의 가사와 분위기는 영화 위를 타고 흐르며 감정의 떨림을 키운다. 여정, 회상의 씬에서의 색채와 어우러지는 음악은 [단지 세상의 끝]이 보여주는 것 중에서도 단연 기억에 남는다.
이 모든 '격동하는 감정의 혼재'는 루이가 집 안을 날아다니다 벽에 부딪혀 떨어진 새를 보고 집을 나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루이는 줄곧 자신이 머물던, 어두운 집으로 비치는 강렬한 빛으로 문을 열고 나간다. 감독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화면에 가득한 빛으로 표현해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빛은 암전으로 사라지지만 감정은 강렬한 빛을 보고 남은 잔상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어쩌면 칠흑 같은 어둠은 죽음에 이르른 루이를 '비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기만 해도 위태로운, '세상의 끝'이란 단어에 담긴 감정들은 어디까지 치닫는가.'를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 바란다. 만약 영화를 보고서 실망했다면 재관람을 권한다. 자비에 돌란 감독은 원작 희곡을 처음 읽었을 땐 그저 무시했지만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자신의 영화로 만드리라 확신했다고 한다. 루이가 가족들과 주고받는 대사와 상황 속으로 몰입하다 보면 루이가 느끼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게 세상의 끝을 만나고서는 바닥에 떨어진 새처럼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을 것이다.
***** 위 글은 아트나인에서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