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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oozoo Dec 18. 2022

천불을 기다리며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독후감

언젠가 백석 평전을 뒤적거리다가 백석이 끝내주는 멋쟁이였다는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다. 양말 한 켤레에 20~30전이었던 때, 백석은 1~2원짜리 양말을 신었다고 한다. ‘1원 50전쯤 하는 양말을 봐두었는데, 신으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서 친구에게 비싼 양말을 강권하던 백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완벽하게 챙겨야 한다’고 덧붙였다던데, 요즘 옷 잘 입는 사람들이 꼭 챙기는 것도 양말이어서 웃었고, 기획자 친구들과 나눴던 ‘기획은 디테일이 전부다’라는 얘기도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평전 속 백석과 소설 속 기행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새롭게 해석된 인물은 조금 더 차분했고, 조금 더 흔들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실존 인물을 모델로 두고 상상력을 펼칠 때 어떤 것이 도움이 되고, 제약이 될까.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소설을 구성하는 기획자의 입장에 서서 읽었고, 작가가 창조해내는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건 때로는 가져다 쓰고, 때로는 바꿔다 쓰고, 때로는 만들어다 쓰면서 자신의 관점을 더해가는 일이었겠다. 기획은 한 세계를, 세계관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작가의 일이 나의 일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한편 이 책은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듣는 연재소설’로 먼저 선보이고, 이후 종이책으로 발간되었다고 한다. 소설을 책이라는 물성 안에 가두지 않은 점이 멋지다. 왠지 실무자가 조금 부러웠는데, 콘텐츠를 어떤 그릇에 어떤 식으로 담을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을 테고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게 즐거웠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퇴사하고 잠시 쉬는 요즘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부럽다’는 마음이 낯설었다. 부럽다는 마음 다음에는 ‘나도 해보고 싶다’가 뒤따라오는 편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점에 책 덕분에 창조의 욕구를 발견하게 된 셈이다. 어쩐지 천불을 보고 두근거림을 느꼈던 기행에게도, 기행에게 희망을 준 김연수 작가에게도 고마웠다. 내 마음에도 불현듯 천불이 내릴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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