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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Feb 04. 2020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울 것

가끔은 어리광도 피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작가 허지웅은 암투병 후 출연한 방송에서,

암을 혼자 이겨내려 했던 것이 힘들었고 후회스럽다며,

사람에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얘길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적지 않은 '용기'를 내야 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남 아닌 부모님에게도 그랬다.

오빠는 게임기다 나이키 운동화다 사달라 조르는 것도 많았는데,

난 사탕 하나 사달란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여섯 살 땐 친구 집에서 2층짜리 '미미의 집'을 보고 

그게 갖고 싶어 며칠을 끙끙 앓았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엄마에겐 미미의 미 자도 꺼내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건 너무 비쌀 것 같았고,

엄마에게 그런 큰 부담을 줄 순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마음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오빠는 잘 졸라댔던 걸 보면 부모님이 특별히 엄해서였던 건 아닌 것 같고.

타고난 기질인가, 생각해본다.


세월이 흘러 오빠와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대학을 왔는데,

난 부모님 바람대로 서울 외가댁에서 통학한 반면,

오빠는 당당하게 자취 선언을 했고, 방값과 생활비를 타냈다.

외삼촌들을 만나면 너스레 떨며 용돈을 뜯어냈다.

나? 삼촌은 물론 부모님에게도 돈 얘길 못 꺼냈고,

이런저런 알바로 바쁘고 가난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오빠가 얄미웠지만, 내 성격이 더 미웠다.

'뭐든 알아서 잘하는 애'로 여기고 흐뭇해했던 부모님도, 조금은 무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본다.  


그렇게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는 '혼자가 편한' 어른이 되어갔다.

가까운 친구에게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가,

그딴 게 삶의 목표라니 너 참 불쌍하단 핀잔을 들었다.

선배나 남자친구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원하는 걸 얻어내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너무 의존적이네, 한심하네 흉봤고,

더 깊은 속에선 부러움을 느꼈다.

그건 내가 배우지 못한 삶의 기술 같은 것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해왔어야만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이번 생의 나는 글렀다 싶었다.


그런 내가 딱 한 사람, 남편에겐 도움도 잘 청하고 어리광도 제법 부린다.

결혼 전 남편과 부모님이 처음 만난 식사 자리에서,

내가 남편에게 '징징거리는' 모습에 놀란 아빠가

엄마에게 살짝, "쟤가 왜 저러는 거냐"고 했단 얘길 듣고 빵 터졌었다.

곰 같은 딸을 키우며 어리광 한 번 못봤던 아빠는 낯선 풍경에 충격을 받은 거다.

어찌 보면 아빠도 좀 안 됐다. 흐흐.

어쨌든, 늦게나마 어리광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게 참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라는 거,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공 세 번, 시험관 세 번, 여섯 번의 실패를 겪고,

네 번째 이식을 앞둔 나는 엄마를 찔러봤다.

"난임 까페 보니까, 이식한 날 친정엄마가 와서 2주 동안 같이 살며 살림해 준 사람도 있대.

엄마도 와서 나 밥해줘. 청소도 해줘."

처음 보는 딸의 응석에 당황했는지, 엄마는 선뜻 말을 못 이었다.

'농담이야' 하고 얼른 주워 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한 번 이렇게 해보고 싶었다.

(갓난아기일 때를 제외하곤) 엄마에게 뭔가를 먼저 요구해본 적이 없다.

알아서 해주는 것만 받았다.

때론 그걸로 충분했지만,

때론 혼자 서운할 때도 있었다.


연습이 필요했다.


마을버스로 10분이면 오는 거리다.

아빠와 함께 가게를 하시긴 하지만, 하루 정도 엄마가 없다고 안 돌아갈 가게도 아니었다.

엄마를 위해 난임 시술을 받는 건 아니지만, 딸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냐, 됐어' 하고 없던 얘기로 하고 싶은 걸 꾹 꾹 참았다.


"알았어. 해줄게."

"아냐, 됐어." (이런...)

"뭘 됐어."


해준다는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참아보기로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끼치고, 아쉬운 소리 하고, 도움을 요청할 일이,

분명히 생길 거니까.

아이가 생긴다면 말이다.


어른 혼자, 또는 둘이 사는 데는 남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큰 소리로 울어대 다른 승객들을 괴롭힐 수도 있고.

식당에서 물을 엎질러 직원에게 일을 만들어줄 수도 있을 거다.

물론,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의 손을 빌릴 일도 생길 거다.


그러니 이젠,

'폐 끼치지 않는 삶' 말고

'도움을 주고 받을 줄 아는 삶'으로 목표를 바꿔봐야겠다.

부모가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데,

부모지망생 시기가 길어지니 조금씩 삶을 달리 보게 된다.


이식한 날은 남편이 휴가를 낸 덕분에, 남편 수발을 받으며 잘 쉬었다.

이식 다음 날, 약속대로 엄마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엄마표 육개장을 두 손에 들고.

밥도 해주고 설거지도 해주고

화장실 바닥까지 박박 닦아줬다.

고맙고 좋은 마음보단 어색하고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참았다.

다음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고, 받을 수 있었으면.


뚝딱뚝딱 집안일을 마친 엄마는 커피를, 나는 따뜻한 물을 두고 마주 앉았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얘길 해줬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얘기다.


나도 언젠가

아이와 마주 앉아, 너를 가졌을 땐 날씨는 어땠고 뭘 많이 먹었는지 시시콜콜 수다를 떨고 싶다.


그날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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