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
<노매드랜드>는 관람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읽힌다. 무너진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는가의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사회의 중심에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밀려난 이들의 삶의 궤적으로 볼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무너진 이들의 떠도는 삶에 시각을 맞출 수도 있다. 시각차이에 따라 관람객의 시선은 풍경, 자유, 치유, 연민, 고독으로 이어진다. 아예 국내 개봉 포스터에는 “영원한 작별은 없어요” “낯선 길 위에서 만난 기적같은 위로’라고 시각을 고정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그들이 길 위의 삶을 살아가는 저마다의 이유만큼 다양한 시각과 그에 따른 시선이 머무르고 떠나는 길 위의 카라반처럼 얽힐 수 있는 영화다.
‘정주’와 ‘유목’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선택이다. 영화 속에서의 시작은 정주하던 이가 어떻게 유목의 길로 들어섰는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인 유목하던 이가 다시 정주하는 선택을 보여 주기도 한다. 선택의 이유는 있지만 논쟁하지 않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주(定住)한다. 집과 일터,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일정한 반경 속에 머무르며 살아간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다른 지역, 다른 도시, 다른 국가로 이동을 하지만 이는 더 나은 정주 조건을 위해서이다. 정주민의 위치에서 영화 <노매드랜드>에 나오는 유목민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시각은 ‘자유로움’이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를, 이동하고 머무름에 있어서 정주민보다 덜 제약적이며, 타인의 의지보다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이 더 넓은 이들.
우리는 가족을 포함한 구성원에 묶여 있다. 주거공간인 집에 묶여 아파트 넓이만큼의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복되는 일상에 ‘일탈’을 꿈꾸지만 한정된 시간과 범위에 머무를뿐 그 이상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정주민이 바라보는 유목민의 삶은 부러움과 함께 정주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함께 한다. 분명히 유목민은 정주민보다 많은 자유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례해서 상대적인 불안감과 쉽게 예측되지 않는 행로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정주민은 ‘일탈’ 이후에 돌아가서 해결해야할 숙제를 남겨둔 존재다. 매주 찾아오는 주말과 휴일, 휴가가 끝나고 다가오는 ‘일상의 복귀’가 무겁게 짓누르는 이들이다. 유목민은 남겨둔 숙제를 떨쳐내고 현재, 곧 지금에 머무르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를, 혹은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유목민은 다가 올 미래보다는 지금 잠시 머무르고 있는 공간과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 길 위의 삶을 선택한 존재다.
‘정주’와 ‘유목’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선택이다. 영화 속에서의 시작은 정주하던 이가 어떻게 유목의 길로 들어섰는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인 유목하던 이가 다시 정주하는 선택을 보여 주기도 한다. 선택의 이유는 있지만 논쟁하지 않는다.
영화 속 대사 “집은 허상인가 아니면 마음의 안식처인가?”에서 정주와 유목을 가르는 상징적인 아이콘인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는 단정짓지 않는다. 집은 누군가에겐 허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안식처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밥 웰스(15년째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실존인물이며 유목민들의 캠프행사를 이끌고 있다)는 “내가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여기서 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자연과 사람들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답을 찾지 못했다면 이곳에서라도 답을 찾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목론(노마디즘)’을 통해 탈근대적 사유를 하고자 했던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주저 <천 개의 고원>에서는 ‘유목주의’를 저항과 창조의 양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 굳어진 관계(홈 패인 공간, 영토화), 즉 정주의 삶이라는 관계를 뚫고 나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공간(매끄러운 공간)으로 유목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유목은 정주처럼 고정된 관계와 질서를 거부하며 지배적 다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소수로서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펀’을 바라보는 정주민의 시선은 동정에 가깝다. 경제적인 문제와 불안정한 삶에 대한 애정과 우려의 표시다. 그 시선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동반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적어도 영화 속 유목민들은 어쩔 수 없이 중심에서 이탈된 비자발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그린다. 지배적 다수가 아닌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 소수의 삶을 그린다.
영화의 시작은 ‘펀’의 짐을 창고에 둘 것과 작은 밴에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여정 속에서 물건들은 점점 줄어든다. ‘펀’의 여정은 비움의 과정이 된다. 영화 마지막엔 창고에 쟁여 두었던 살림살이들까지 나눠주고 그녀가 살았던 마을과 빈집을 둘러보고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정주민에서 시작해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다가 좀 더 깊은 차원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정물과도 같은 삶을 살다가 자연의 풍경처럼 머물더니 마침내 광활한 풍경에 한 개의 점으로 남길 각오한 외로운 순례자의 모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