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읽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제작소 Oct 04. 2021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렛미인>

북유럽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뱀파이어 영화다. 낮보다 밤이 길고,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쌓이는 풍경 속에서 주변의 소음들이 소거된다. 소리없이 진행되는 영화다. 하얀 눈과 붉은 피, 강렬하게 대비되는 시각적 이미지로 남는다. 


내용에 있어서도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암시적인 표현으로 지나가고, 적막함 속에서 탄식과 안타까움이 단계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탄식과 안타까움은 아름다움과 애틋함을 동반한다. 그래서 애틋하면서 아프고, 시리도록 아름다우며, 단순하지만 선명함으로 남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12살 8개월 9일’을 살았다고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소년 오스칼의 옆집에 ‘12살쯤’이라고 살아 온 시간을 얼버무리는 소녀 이엘리가 이사를 온다. 이엘리는 오래 전 어느 날 12살의 나이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12살을 지나고 있는 소년과 수 백년의 시간을 12살의 외모로 살아가는 소녀가 적막하고 어두운 놀이터에서 만난다. 


‘탄식’은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다. ‘애틋함’은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이 진행되면서 예측될 수 있는 운명의 과정 속에서 나온다. 위의 감정들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뱀파이어의 ‘시간의 상대성’에서 기인한다. 유한한 존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어가며 쇠락해 갈 것이다. 이에 반해 뱀파이어는 뱀파이어가 된 순간부터 성장과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12살의 모습으로 수 백년을 살아 온 이엘리와 함께 했었을 수많은 유한한 존재들. 오스칼의 미래를 이엘리와 같이 사는 늙은 남자에게서 보게 된다. 영화 <렛미인>은 늙지 않는 영생의 삶을 살아가며, 보통 인간과 비교도 안될 괴력을 지닌 초월적 존재로서의 뱀파이어에 집중하지 않는다. 12살의 외로운 소년과 수 백년의 12살을 살아가고 있는 소녀의 외로운 성장기를 다룬다. 


뱀파이어 영화에서 연상할 수 있는 강렬함과 액션, 잔인함과 공포가 스웨덴의 시리고 적막한 겨울 속에 묻힌다. 영화는 어둠과 흰 색이 지배하는 풍경에 뿌려지는 선혈 속에서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흐름을 따른다. 기존 뱀파이어 영화에 등장할 법한 것들을 빼고 감독에 의해 선택된 것들만이 남아 반짝이며 빛난다. 


‘왕자는 공주를 구출하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아름다운 궁전에서 행복하게 살았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와 무한에 가까운 존재의 ‘시간의 상대성’으로 인해 다가 올 미래는 어긋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특수성으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관계에 놓인다. 이렇게 기울어진 관계를 예측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동화’같은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은 소설 원작(스웨던 작가 욘 린퀴비스트의 동명 소설)에서 다채로웠던 이야기들을 살뜰히 발라내고 펼쳐낸 영화의 리듬에 있다고 하겠다. 


사람의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와 그 희생자인 사람의 관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는 전개는 더욱 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금기를 깬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소년은 끝을 알면서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의 여정을 떠난다.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영역에 들어갈 때 꼭 그 영역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 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고통에 빠진다. 영화 제목인 <렛미인(Let Me In)>은 너의 영역으로 나를 들여보내 달라는 허락의 의미다. 영화의 제목처럼 서로가 좁혀질 수 없는 물리적 간극이 존재하고 있지만 소년과 소녀에게 그것은 장벽이 되지 못한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께’라는 이엘리의 메모 속에서 뱀파이어를 호러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2008년 개봉 되었던 이 영화는 2010년 맷 리브스 감독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다. 같은 원작으로 영화화 되었지만 스웨덴 버전보다 현실적이며 그들 간의 사랑은 직접적이다. 스웨덴 버전이 한편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동화의 분위기라면 미국판은 뱀파이어 영화의 스릴러와 액션 등의 장르에 충실하고자 했던 점이 보이며 슬픔의 감정을 끌어 올린다. 


다소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어느 것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취향이 갈릴듯하다. 굳이 추천하자면 스웨덴판 <렛미인>을 먼저 볼 것을 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라져 가는 추억의 조각들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