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얼 하든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만 한다
몸과 마음 둘 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만사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어느덧 5년 차인 유학 생활, 물론 지난 4년 내내 마냥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이따금 오르락내리락한 적은 있지만, 돌아보면 나는 나름 잘 지내온 것 같다. 일단 박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면 내가 주도적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결과물도 작년에 많이 나와서 드디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성과까지 가지 않더라도 즐겁고 보람찬 기억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 유학생활이 분명 고되고 외로움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박사 과정은 석사와 달리 2-3년 안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친구들은 다 직장 취직해서 밥벌이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당장 생계와는 어찌 보면 한참 동떨어져 있어 보이는 주제를 파고 있다 보면 현타가 한 번쯤은 오기 마련이다.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면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사는 친구들도 상당하다. 며칠 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들의 MBTI를 조사해 봤더니 T가 압도적으로 많더라는 기사를 읽었다. 남들 신경 쓰고 마음 주는 F들은 이래저래 사람들에 치여서 공부에 영향을 받기 쉬운데 T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점이 덜하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 공부에 집중을 잘하는 편이고 그것이 성취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었다. 여하튼 유학생활의 핵심은 학업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선별해서 우선순위를 세우고 불필요한 것들은 가지치기하고, 그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그것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나름 잠시 직장 생활도 했고 한국과 미국에서 살아보니, 결국 어디서 무얼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이라는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한다. 육체와 정신 둘 중 하나만 건강해서도 안 된다. 육체는 건강한데 정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그것도 불행하고, 반대로 정신은 건강한데 육체가 건강하지 않아도 불행하긴 매한가지다. 사실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기 힘들다. 그래도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정신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하고 싶다.
며칠 전에는 가까운 친구 중에 한 명이 학과 세미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가려던 나를 붙잡고 잠시 small talk을 나누더니, 연구실까지 가는 나를 바래다주겠다며 쫄래쫄래 따라왔다 (세미나실에서 연구실까지 가방 한 세 번 던지면 될 거리). 나는 괜히 바쁜 사람 시간 뺏는 것 같아서 (그리고 멀지도 않은 거리 그냥 나 혼자 가면 되는데 누가 날 바래다 줄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쳐도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좀 걸어야 한다'며 따라왔다. 같이 걸으며 대화를 하면서 깨달았다. 알고 보니 지난겨울 방학 때부터 계속 써온 소논문 때문에 멘붕이 와서 우울한 마음을 나한테 토로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내 연구실 앞까지 와서도 나는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가 갈 생각을 안 했다).
나는 데드라인이 없거나 꽤 여유가 있는 일을 하는 경우에는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5일 중에 1-2일 정도는 친구들과 카페에서 같이 공부를 한다. 같이 모여 앉아서 공부하다 보면 서로 약간 자극도 되고, 외로운 박사 생활 중 고립감도 덜어지며,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가 어쩌면 팍팍하기 그지없는 이 박사 생활에 조금의 양념처럼 숨 쉴 공간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서로 공부하며 힘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싶어 안도되는 것도 있고, 이런저런 소식도 주고받다 보면 연구에 관한 좋은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데드라인이 임박했거나 아주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혼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비율로 치자면 5번 중 3-4번은 혼자서 한다. 최근에는 데드라인이 임박한 페이퍼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연구실도 가지 않고 (내 연구실은 나 포함 총 4명이 같이 쓴다) 학교 근처 카페나 집에서 일을 하느라 수업 시간 외에는 친구들을 통 볼 일이 없었다. 그 사이 아마 그 친구가 나를 찾았던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빵을 굽겠다며 베이킹 소다와 저울을 빌려가길래 (나는 스트레스받을 때면 빵을 굽거나 요리를 한다) 너도 이제야 요리에 취미를 붙였구나 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빌려줬었는데, 알고 보니 그날이 가장 우울의 최대치를 찍은 날이었다고 해서 놀랐다. 친구가 그날 구운 빵을 맛보라며 가져다줬었는데, 그게 그런 눈물의 빵이었을 줄이야. 마냥 맛있게 먹기만 한 게 조금 미안했다.
"그렇게 힘들면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나는 또 네가 기분 좋아서 베이킹하는 줄 알았어."
"너도 바쁜 것 같아서.... 그럼 혹시 괜찮으면 다음에 공부할 때 같이 해도 돼?"
"그럼! 나 이 페이퍼만 제출하고 나면 급한 거 없으니까 카페 갈 때 같이 가자."
"좋아! 그리고 혹시 하이킹 좋아해?"
"잘하진 못하지만 좋아는 해! 주말에 갈까?"
"응!"
친구는 캠퍼스 심리상담 센터에도 emergency로 상담을 신청해 두었다며 (이 부분에서 가장 놀랐다. 긴급상담 신청이라면 정말로 마음이 어렵다는 것 아닌가) 당장 오늘이라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마침 여행 중이셔서, 지금 당장 귀국해도 혼자 지내야 하니까 일단은 상담센터부터 찾았다고 했다. 유학생활 하면서 다 때려치우고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나도 그런 생각 몇 번 했지만 결과적으로 때려치우지 않고 어찌어찌해왔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누군가 '유학 전으로 돌아가 터득하고 싶은 라이프 스킬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어려움이 닥쳤을 때 마음의 평안을 찾고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법, 이라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공립 교육 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고, 입시 경쟁에 찌든 아이들과 부모 입장에서도 이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그런데 살아보니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법이 아니었다. 실패를 하더라도, 혹 정신적으로 무너지더라도, 다시 무릎을 세워 일어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서 내 인생에 남길지 하는 것도. 인간의 뇌 용량은 제한되어 있어서 모든 경험을 100%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만 조각내어 일부를 기억하는데, 이때 그 사람의 지난 과거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내 관점을 만들고, 그 관점에 따라 특정 프레임으로 그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동일한 일도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고 긍정적인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이 또한 당연한 얘기겠지만.
대단한 팁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지난 4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해 내가 터득한 스킬이라면, 일단 기본적인 의식주를 잘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내담자들을 상담할 때 제일 먼저 묻는 것이 '하루 몇 시간 자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박사 과정생이 잠을 펑펑 자는 것도 이상한 얘기일 수 있는데, 나는 차라리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밤 12시 전에는 자려고 하는 편이다. 너무 늦게 자는 일이 반복될 때 상대적으로 쉽게 우울해지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일단 새벽까지 깨어 있으면 낮에 비해 우울한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박사 과정은 마라톤이다. 최소 4년은 해야 하는데 매일 3~4시간씩 자면서 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내 친구들의 경우에는 잠을 줄여가면서 공부를 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 친구들은 (높은 확률로) 정신적으로는 상당히 안 좋은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조금 못 하더라도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같은 이유로 밥도 잘 챙겨 먹는다. 나야 워낙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요리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기도 하다. 조금 울적한 날에는 밤에 자기 전에 인터넷으로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를 찾은 다음에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그 요리를 해 먹는다. 조금 어려운 과제를 했거나 페이퍼를 냈다든가 발표를 했다든가 하듯 어떤 결과물을 낸 다음에도 내게 주는 보상으로 평상시라면 가지 않았을 조금은 비싸거나 맛있는 것을 사 먹기도 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오전 10시 이전에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 햇빛이 눈 속으로 들어오면서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것을 감소시켜준다고 한다. 요새는 스케줄러에 매일매일 기분이 어땠는지 표시를 해두고, 유난히 기분이 좋았거나 우울한 날에는 뭘 했고 뭘 안 했는지 확인도 한다. 대체적으로 아침 산책을 며칠 동안 걸렀을 때 좀 더 우울해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산책을 하고 난 다음에는 기분이 상쾌하고 한결 긍정적이 되는 것을 (미약하게나마) 느낀다. 산책이나 운동은 할 때는 사실 큰 효과를 모르다가 안 하면 그 효과가 확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 인생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은 생각보다 훨씬 많고, 때로는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왕왕 본다.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굉장히 나쁘게 보이는 일들도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었던 경우도 경험했다. 그 경험들이, 지금 당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역경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학계는 누가 더 멋진 결과물을 내느냐, 어느 학회에서 발표했나, 어느 학술지에 기고했나, 실적이 모든 것을 말한다. 이 바닥에서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면서 우직하게 이 길을 걷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박사 논문이 대단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유학 생활을 마친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해야겠다 생각하게 된 건 그 때문이다. 내 나라에서 내 나라 말로 해도 고생인 이 길을 타국에서 다른 나라 말로, 수많은 인종에 둘러싸여 지금도 힘든 길을 걷고 있는 전 세계 모든 유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