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부대껴 살아야만 보이는 것들
유학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들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을 들겠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학업보다 이게 더 내게는 크고 중요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문적인 부분이야 유학 오기 전부터 당연히 많이 배울 것이라 예상했고, 또 예상대로 많이 배우고 있기 때문에 크게 놀라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인간'이란... 이 먼 이국땅에 와서 온갖 국적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 틈에서 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면적인 존재인지를 나는 이제사 비로소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건 미국에서 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특히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다수의 타인과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우리 학교는 미국 대학교들 중에서도 기숙사 건물이 낡고 시설이 열악하기로 유명(?)하다. 여기서 살면서 쭉 기숙사에서만 살았던 탓에 고급 주택에서 살아본 적은 없는지라 모든 하와이 주택이 다 이런 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캠퍼스 내 건물들은 다 기본 1940-5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이라 일단 굉장히 낡고, 무엇보다, 벽이 굉장히 얇다. 이게 무슨 뜻이냐.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구실의 경우는 종일 에어컨이 돌아가기 때문에 에어컨 소리에 조금 묻히기도 하고, 또 연구실에서는 말 그대로 연구를 할 뿐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가장 개인적인 의식주 생활을 하는 기숙사에서 벌어진다. 내가 사는 기숙사 건물은 복도 맨 끝에 공용 화장실이 있고 그 화장실 바로 옆 칸부터 대학원생들 1인실 방이 쭉 붙어 있는데, 이게 화장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방의 경우는 화장실과 그 얇은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정말이지 소음 공해의 지옥이다. 나의 경우 2년 차 때 이 방에 한 번 배정된 적이 있는데, 밤낮으로 화장실에서 나는 수돗물 소리, 사람들 볼 일 보는 소리(이게 제일 괴로웠다), 샤워 소리 등 온갖 소음에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밤 중에 자다가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깬 적도 있다. 그때는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수업과 미팅이 줌 미팅으로 대체되던 시절이라, 한 번은 줌 미팅하는데 상대방이 '너 어디에 있길래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냐'고 해서 민망했던 기억도 있다.
앞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다면적인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썼는데, 그걸 처음 알게 된 사건이 바로 이 화장실 소음과 관련이 있다. 소음이 워낙 심하다 보니 화장실 바로 옆에 위치한 이 방은 대부분 학생들이 한 학기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편이다. 나 또한 해당 학기 마치자마자 다른 방으로 옮겼다. 새로운 방을 배정받는 것은 랜덤인지라 사실 더 나은 방으로 배정될 수도, 더 별로인 방으로 배정될 수도 있어 학생들이 조금 꺼려하는데 당시에는 그 어떤 방으로 배정받더라도 이 방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변경을 신청했다.
여하튼 아직 다른 방으로 배정받기 전, 그 화장실 바로 옆 방에 살 때 일어났던 일이다. 나와 정 반대편 복도 끝에 사는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이 학생이 종종 밤늦은 시간에 화장실에서 크게 오디오를 켜 놓고 샤워를 하거나, 남자친구와 화상 통화를 하거나 유튜브로 동영상을 스피커폰으로 하고 보는 일이 잦았다. 수돗물 소리도 바로 옆에서 나듯 생생하게 들리는 상황이니 야심한 시각에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유튜브 시청을 하면 얼마나 큰 소리였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견디다 못한 내가 '너무 시끄러우니 주의해 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평상시에 쾌활하고 사회성 좋은 친구인지라 사실 나는 처음 그 얘기를 언급할 때만 해도 '오 그랬냐 미안하다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하며 쿨하게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주의해달라'고 했던 워딩이 아마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나를 따로 불러내서는 '네가 언제 네 방에 있는 줄 알아서 나더러 주의를 하라는 것이냐, 그런 걸 얘기하려면 나한테 "부탁한다"고 더 정중하게 말했어야 한다. 그런 게 싫으면 기숙사 나가 살 것이지 왜 여기 사냐'고 하는 게 아닌가. 여럿이 다 같이 사는 공용 공간이니 조용히 해주면 좋겠다는 게 이 정도로 미안해하면서 수그리고 들어가서 '부탁'을 해야 하는 성격의 일인지도 난 잘 모르겠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거나 샤워를 하는 것처럼 안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유튜브 시청이나 화상 통화 같이 충분히 다른 공간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제해 달라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들어주기 어려운 일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어떤 학생은 자정이 넘으면 샤워도 가급적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온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에게 자정 전에 샤워하고 잠들라는 것은 거의 회사원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회사생활하라고 하는 것과 동급의 말이지만 그래도 당시 그 층에 살던 나를 비롯한 애들이 모두 착했지, 우리 모두 그 부탁을 들어주었었다 ㅋㅋㅋㅋㅋ 어쩌다 과제가 늦어져 밤늦게 마치고 자정 넘어서 샤워를 하게 될 때는 행여 그 학생이 잠에서 깰까봐 후다닥 샤워하고 나왔던 기억....
그런 기억이 있었던 지라 이 날 상대의 불쾌해하는 반응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일로무려 한 시간 동안 대화했다. 한 시간 동안 대체 무슨 대화를 했냐고? 그냥 서로 자기 말만 하는 대화였다. 나는 계속 조금만 조용히 해주면 좋겠다고 하고 상대는 못하겠다고 하고.... 한국말로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그때 난생 처음 알았다. 이 정도로 길게 (그것도 굉장히 안 좋은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하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상대의 너무 거센 저항에 당황을 했고 나중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상대가 워낙 쿨하니 이 정도 말하는 건 좋게 받아들여질 줄 알고 말한 건데 차라리 내가 그냥 계속 스트레스 받으며 살 것을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동안 말싸움하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또 다른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벽에 대고 끝없이 반복되는 대화를 하는 것에 지친 내가 알겠다고, 그냥 원래 사시던 대로 사시고 내가 방금 한 말은 그냥 잊어버리시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갑자기 좀 머쓱해졌는지 '그래도 Jean 씨 정도 되니까 이 정도 대화가 되네요. 보통은 개싸움으로 이어질 텐데'라고 말하고 내 등을 툭툭 두드리더니 자리를 떴다. ('개싸움'이라는 단어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그 친구가 그 정도로 화를 냈던 것은 나중에 내가 다른 방으로 옮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살고 있던 방은 화장실에서 상당히 떨어진 방이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나는 소음이 얼마나 큰지 그 친구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현재 그녀의 방만큼은 아니더라도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아주 멀리 떨어진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음의 크기가 훨씬 줄어든 것을 느낀다. 그러니 그 친구 입장에서는 별로 크지도 않은 소리 갖고 내가 예민 떤다고 느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수 년이 지난 지금에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황당하고 불쾌했다.
두 번째 사건도 기숙사에서 알고 지냈던 학생과 관련이 있다. 이 학생은 진짜 미스 유니버스 마냥 키도 크고 늘씬하고 예쁘고 착하고 흠 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친구였다. 그런데 막상 기숙사에서 같이 살아 보니 이 친구는 공용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나면 정리를 잘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친구가 요리를 마치고 나면 주방에 온갖 요리 재료 손질하고 난 채소와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서 수채 구멍이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다.
물이 빠지지 않아서 너댓번 두 손으로 퍼서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수채구멍이 겨우 보였고 고여 있던 물이 빠졌다.
처음에는 이 친구가 범인인지 모르고 요리를 하러 가면 간혹 이런 일이 일어나길래 누굴까 정말 무개념이라고만 생각했다. 보통 요리를 하고 나면 설거지하고 주변 공간을 다 정리까지 하는 것이 공용공간을 쓸 때의 상식 아닌가? 나를 비롯해 기숙사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대학원생들이다 보니 바쁜 와중에 요리하다 보면 바빠서 미처 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가는 경우는 당연히 있다. 나 또한 너무 지저분해서 다음 사람이 요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어떨 때는 대충 정리하거나 안하고 그냥 자리를 뜰 때도 있다. 그런데 수채구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 두고 가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서서 치우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서 요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걸 내가 그 친구에게 말했을까? 난 결국 말하지 않았다. 그냥 늘 막혀 있던 수채구멍을 내가 치웠다. 앞서 한국인 학생에게 스피커폰 주의 좀 해달라고 말했다가 1시간 동안 붙잡혀서 혼난 트라우마가 남은 데다가 어차피 그 학생은 그 학기를 끝으로 졸업하고 기숙사를 나간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 친구는 그 막힌 수채구멍을 늘 누가 뒷수습하는지는 알지 못한 채 기숙사를 떠났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친구는 앞서 그 한국인 친구와 마찬가지로 남을 잘 배려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밤늦은 시간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고통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오디오 틀고 화상 통화하는 건데 네가 뭔데 내 권리를 침해하냐고 나왔다. 내 기준에서는 두 가지 면은 상충되어 공존할 수 없는 면들인데 그녀의 안에는 그 두 가지 면이 공존했다. 나는 그게 정말 신기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수채구멍 막히도록 요란하게 요리하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착하고 야무지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는데, 공용공간을 쓰고 나서 정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내가 안하면 누군가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여하튼 이후에 그 친구는 하와이 현지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어느 날은 내 지인(역시나 그 친구를 알고 있는)이 그 친구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는 대체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길래 걔와 결혼하는 걸까!'
난 속으로 웃었다. '그 남자는 과연 이 아이가 수채구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요리하고 나서 정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까?' 하긴 어쩌면 수채구멍 따위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워낙 괜찮은 사람이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남자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나는 그 친구의 경우도 정말 신기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남을 배려하고 타인과 잘 어울려 사는 사람 같은데 주방에서는 절대 뒷정리하지 않고 남에게 맡기는 성향이라니... 두 가지 성향 역시 한 인간의 안에 공존할 수 없는 성향 같은데 정말 미스테리였다.
이 외에도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 친구가 겪은 일도 있다. 공용 세탁실에서 누가 쓰던 건조기를 멋 모르고 열었다가 때마침 그 건조기에 옷을 넣어둔 당사자와 마주쳤는데 불 같이 화를 내더라고. 실수로 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도 죽일 듯이 화를 내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는 이야기. 기숙사 건물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온갖 국적과 전공이 섞여 있다 해도 사실 한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 기숙사다. 내가 불 같이 화를 낸 이 사람이 알고 보니 내 절친의 동료이거나 후배이거나 선배일 수 있단 얘기다. 그런데도 그 사람처럼 불 같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나중에 '걔가 이렇게 화 냈다'는 이야기를 하면 기숙사 밖에서는 너무 평판이 좋아서 '걔가? 걔 엄청 괜찮은 애잖아!"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유학을 오기 전에 나는 왜 10년 넘게 연애하고도 결혼해서 얼마 못 살고 이혼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아했는데,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 내에서는 본성이 나온다. 그리고 생각보다 의외로, 그 본성이 정말 싸가지 없고 악한 경우가 많고, 생각보다 멀쩡히 사회생활 잘하고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평판이 좋은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면들이 드러날 때가 많다. 뭐 이렇게 글 쓰고 있는 나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정말 피곤하고 짜증날 때는 평상시라면 100정도 되었을 짜증게이지 threshold가 50으로 무너져 내릴 때도 있으니까. 여하튼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것처럼, 남들 또한 그렇다는 것을, 보이는 게 정말로 다가 아니고, 어떨 땐 보이는 것과 정 반대의 것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달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