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가 불러온 생각의 바람
작년에 혼자 부산여행을 갔다.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호텔에서 전화가 왔다. 티셔츠를 놓고 갔다고. 산 지 얼마 안 됐고, 꽤 마음에 드는 거였는데. 잃어버린지도 몰랐는데 찾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티셔츠를 가지러 가는 길에 친구들이랑 카톡을 했다. 1박 2일이고 짐도 별로 없었는데 티셔츠를 놓고 온 나는 뭘까 하니까 친구가 그랬다. 그냥 티셔츠를 놓고 온 사람이라고. 왜 이렇게 있는 그대로 생각을 못하냐고. 나의 부주의함에 대해서 자조 섞인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냥 웃었다. 그래 그냥 티셔츠를 놓고 온 사람. 그게 나지.
그 티셔츠를 얼마 전 제주도 여행에도 들고 갔는데 결국 놓고 왔다. 내가 좀 꼼꼼하지 못한 편이긴 한데 이 정도는 아닌데... 물건과 나 사이에도 상성이 있는 건가 했다. 그래서 호텔에 전화도 하지 않았다.
상성이 안 맞는 사람과 잘 지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적이 있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이었고 어떤 날에는 우정이라는 이름이었고 그것 보다 더 자주 밥벌이라는 이름이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면 모두와 잘 맞아 보이는 사람에 대해 상상했다. 그 사람이 수없이 깎아내리거나 숨겼을 자아에 대해서. 마음속에 품은 말과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 같은 것들에 대해서. 어쩌면 이제 그 모든 과정이 당연해서 힘들지도 않을 그 사람이 맞춰주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최근에 그런 사람을 알게 됐다. 상성은 좋았던 것 같은데 아마 그쪽에서 많이 맞춰줬겠지. 좀 더 편하게 나를 대해도 상관없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지금도 충분히 편하다고 대답했겠지만. 그 말을 전하지 못한 채 멀어졌다.
상성이 나쁜 사람을 맞추는데 너무 힘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려 깊던 그 사람의 마음이 궁지에 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궁지에 몰리더라도 잘 빠져나올 만큼 현명한 사람이지만. 겁이 많은 나는 이렇게 그 사람의 안녕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