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들만 노리는 범인. 이 거대한 공포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불안에 떱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은 그 범인을 열심히 쫓으며 잡고 싶어 합니다. JTBC의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의 내용인데요.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귀엽고 약해 보이는 여자 주인공 도봉순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겉모습과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타고난 막강한 힘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나쁜 사람들과 맞서 싸웁니다. 국내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여성 히어로입니다.
수많은 작품 속 영웅은 대부분 남성이었죠. 여성은 그를 돕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여기선 이런 고정적이었던 성 역할도 바뀝니다. 남자 주인공 안민혁은 처음엔 도봉순의 파워를 알고 놀라워 하지만 배척하지 않고 이를 적극 받아들입니다. 힘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 트레이너 역할까지 자처하죠. 히어로를 위한 보조 인물의 역할을 남성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들지 않으신가요. 왜 대부분의 히어로물에서 남성이 영웅 역할을 맡았던 걸까요. 단지 남성이 힘이 더 세다는 이유만이었을까요. 어차피 히어로는 상상 속의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 힘의 정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으니 여성이 이 역할을 맡아도 상관이 없죠. 그런데 늘 남성들의 차지였던 것은 콘텐츠 제작자, 대중들의 잠재의식에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는 JTBC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요. 그저 늘 남성이 있던 자리에 여성을 두는 것. 그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 아닐까요. 정형화된 관념을 살짝 뒤흔든 것만으로 ‘비(非) 반전의 반전’이 이뤄진 것입니다.
‘걸크러쉬’란 말이 언제부턴가 하나의 문화 트렌드가 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겠죠. 걸크러쉬는 ‘Girl(소녀)’와 ‘Crush on(반하다)’를 합친 말로, 멋진 생각과 언행으로 여성들의 선망을 얻는 여성 혹은 그런 마음을 뜻합니다. 어쩌면 걸크러쉬가 특별한 건 아닐지 모릅니다. 걸크러쉬를 대표하는 방송인 김숙이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하는 말을 살펴볼까요. “여자 바깥일 할 때 따라오지 말랬잖아.” “남자는 돈 쓰는 것 아니다.” ‘남자’란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여자’가 들어가고 ‘여자’가 들어갈 자리에 ‘남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동안 갇혀 있던 고정관념을 순간 인지하게 되고 통쾌함까지 느끼게 됩니다.
지난해 6월 개봉했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도 호평을 받으며 큰 화제가 됐었는데요.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두 여성의 동성애를 다룬 퀴어영화 그 이상이었죠. 두 여자 주인공 히데코와 숙희는 남자 주인공 코우즈키와 백작이 주는 거대한 성적 억압의 틀을 강한 연대로 부셔버립니다. 남성들이 주도하는 대로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들을 속이고 응징하죠. 전형적인 여성상에 갇히지 않고 극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는 주체가 된 것인데요. 이같이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은 ‘여혐(여성혐오)’ 현상이 극에 달하고 이와 관련된 범죄까지 벌어지고 있던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별에 따른 역할 구별은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오래전부터 당연시됐습니다. 여성은 한 작품의 대상, 보조일 뿐이지 생산 주체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1989년 미국 뉴욕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 포스터를 볼까요. 여기엔 이런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메트로미술관의 근대미술 부문 작품 중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5%에 그치는 반면,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의 85%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을 비꼬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데요.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여성의 대사 비중은 27%에 불과했습니다. 여성 주인공도 29%에 그쳤죠. 국내에서는 더 심합니다.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전체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1년 10.7%에서 2015년 5.2%로 역주행했습니다. 여성에겐 조연과 스태프가 어울린다고 말하는 듯한 숫자입니다.
영국의 철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일상적인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종속은 범세계적 관심이 되었고,
이로부터 일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밀이 살았던 시기는 19세기입니다. 하지만 21세기가 된 요즘도 그의 말은 유효한데요. 물론 여성이 모든 콘텐츠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이어져 온,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불균형이 해소되길 바랍니다.
STEP 1. 꼭 기억해요!
*다양성 관련 콘텐츠: 인종=영화 '문라이트' , '히든 피겨스'
여성=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영화 '아가씨'
*다양성 관련 콘텐츠가 유행하는 이유: 혐오 사회의 부작용을 콘텐츠를 통해 해소하고 나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저항과 도전!
STEP 2. 더 알면 좋아요!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 다양성은 창의성의 원천이 되며, 차별이 사라졌을 때 문화도 꽃필 수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