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멋 모르고 했던 말과 행동이 있다. 끝을 생각하지 못하고 시작하는 인간관계가 있다. 매일의 감정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줄을 몰라 적어두고는, 잊으려 애써버린 일기들이 있다.
시간과 함께 쌓이는 것들은 모두 지저분하게 여겨진다. 내 방에 쌓여있는 30권이 넘는 일기장들, 언젠가 공부하겠지 싶어 사놓았으나 결국 성취되지 못한 학업의 흔적들, 한 때 지속적인 만남을 약속했으나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해진, 잘 지내냐는 연락조차 할 수 없게끔 멀어진 휴대폰 속 연락처들, 꼭 한번 무대에서 불러봐야지 싶던 나만의 노래 플레이리스트.
나는 이것들이 아쉽다. 그립다. 후회된다.
이제껏 쌓아두기만 해서 더 이상은 쌓아둘 물리적, 심리적 공간도 없다. 방 안은 내가 비워내지 못한 미련들로 가득찼고, 마음은 내가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로 혼잡하다. 이제 비워내야 할 때다. 편히 쉴 수 있는 깔끔한 내 방, 용감히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만 29살이 되었다. 그동안의 나는 쌓아오기만 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쌓아두다 보면, 자연히 정리되고, 언젠가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것들을 꺼내서 쓰게 될 줄 알았다. 흩어져있던 퍼즐조각은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가 멋진 그림으로 맞춰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정리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끊어내지 않으면, 비워내지 않으면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 것 같다.
쌓아둔 것들 중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모두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동안의 관계에 지치고, 눈 앞의 현실을 정말 훌륭히 살아냈다 하더라도, 곧 한없이 막연한 미래에 숨이 턱 막혀올 때면 모든 것을 리셋하고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진다. 다시 갓난아기 때로 돌아가 모든 시간을 새롭게 쌓아올리고 싶어진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무인도라도 가서, 이제 남은 시간이라도 새로 시작하고 싶어진다.
현재를 사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청산되지 못한 빚더미처럼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과거, 내가 가지 못했으나 갔더라면 참 좋았을 그 길에 미련을 갖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리셋된 세상이라 가정하고 자유롭게 하루를 살아내자고 다짐하지만, 과거에 붙잡혀 사는 나는 그게 참 어렵다.
정리되지 못한 30년. 인생에 리셋 버튼이 없다면,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리셋 버튼이 존재하고, 나는 매일 그것을 누르며 잠에서 깬다고 세뇌라도 시켜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