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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롱썸 Aug 11. 2017

마더 네이처를 찾아서

크루거 국립공원에 가다

아빠는 한 해에 최소한 한 두 차례씩 뜬금없는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한다. 집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오빠는 '이번엔 또 어디'라는 반응을 보이곤 하지만, 시간이나 돈이 없어서 못 가는 나는 침만 꼴깍 삼키거나 나도 같이 가면 안되냐고 묻곤 한다.


남아공에 오기 전에 아빠와의 캄보디아 여행을 계획했었다. 동남아는 웬만큼 다녀보았지만 아직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같은, 그중에서도 정말 개발이 덜 된 나라들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올해는 난생처음으로 부녀가 단둘이 캄보디아에 가서 인류의 유산 앙코르와트를 보고 오자는 희망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남아공행 확정 연락을 받고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3년 전쯤이었을까. 아빠는 마더 네이처를 보기 위해 케냐로 떠난다고 공표했다.


아빠가 늘 여행을 같이 다니는 가장 친한 친구분과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빠의 여행에 숟가락을 얹을 요량으로 나의 여행 메이트 J에게 바로 연락했다.


의대생인 J는 방학이면 놀고먹고 여행 다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친구다. 계절학기로 홍콩에 갔을 때에도, 작년 베트남에 있을 때에도 놓치지 않고 나를 찾아와 같이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만큼은 반대란다. 마침 그 학기 기생충학을 들으며 아프리카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는 교훈을 얻었다나.


친구의 거절 말고 가난한 주머니 사정과 에볼라 소식도 한 몫했다. 당시 집에서는 에볼라 바이러스 이야기를 듣고 대체 이 시기에 왜 아프리카에 가냐고 아빠를 뜯어말렸지만, 아빠는 동부 아프리카는 안전하다며 예정대로 아프리카로 떠났었다.



그렇게 삼 년 전 아빠의 아프리카 여행과 함께 잠시 상상으로만 떠났던 사파리를 남아공에서 다시 계획하게 될 줄이야. 나는 케냐나 탄자니아 대신 크루거 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으로 떠나게 되었지만.


한국에 돌아가기 전 무조건 크루거는 갔다가 가리라고 계획만 하고 있었지 딱히 구체적인 플랜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주어진 휴가가 워낙 적어 2박 3일 정도면 최대겠구나 싶어 의욕이 한풀 꺾인 상태였다.


죽음을 생각했을 때 보다 건설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 역시 좀 과한 비유인 것 같지만 아무튼 남아공 생활의 끝을 생각하니 소중한 주말을 이렇게 보내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주말을 한주 한주 의미 있게 보내야겠다 싶었다.


*아래의 모든 사진은 제가 찍었고, 밝기 수정과 같은  간단한 보정도 전혀 하지 않은 사진입니다. 아프리카 여행 뽐뿌 주의


크루거 국립공원 사파리 계획하기

기린은 역시 포토제닉


생각보다 사파리는 가격이 비쌌다. 2박 3일에 80만 원 가까이 되는 곳도 많았다. 예산 앞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사파리를 위해서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끊는 우리 아빠가 생각났다. 일부러 생각했다고 해야하나.



 '나는 사파리 가격만 부담하면 되니
이건 엄청 싼 거다.',


'이번에 사파리를 안 하면
나중에라도 사파리를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에 가겠다고할 지 모른다.'


등등의 정신 승리를 하고 본격적인 검색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찾게 된 곳은 아래의 사이트이다.

https://thetravelintern.com/kruger-national-park-budget/


싱가포르 여행자가 정리해 놓은 저렴한 사파리 옵션들인데,  나도 이 중에서 하나로 골라 가게 되었다.


너무 저렴한 것은 왠지 좀 불안하고, 그렇다고 7-80 만원은 부담스럽고 해서 최저가는 아닌 55만 원 정도인 Africa Budget Safari로 정했다.



남아공엔 워낙 온라인에서도 사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뜻 6060 랜드를 보낸다는 것이 찜찜하기는 했지만, Trip advisor의 평을 보고 한줄기 믿음을 가졌다.


사흘 뒤에 떠나는 일정은 좀 갑작스러워서 그다음 주로 예약할까 했는데, 그다음 주와 그 다다음주는 자리가 하나도 없다고 하여 선택권 없이 당장 사흘 뒤 사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Africa Budget Safari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파리 패키지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출발 당일 아침 나를 픽업하기 위해서 직접 찾아와서, 사파리가 끝난 후 집으로 다시 넣어주기까지 해서 아주 편했다.


캠핑이라는 걸 처음 해보는 것이었는데, 캠핑 시설은 생각한 것만큼 열악하지 않았다. 나 혼자 사용할 수 있는 텐트를 배정받았고, 텐트 안에서 전기도 사용할 수 있었다.


겨울이라 많이 추우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성능 좋은 온풍기 덕에 춥지도 않았다. 첫날은 온풍기가 선풍기처럼 생겨서 선풍기로 오해해서 틀지 않았는데도 잘만 했다. (경량 패딩에, 후리스, 후드티, 바람막이 등 여섯 겹을 껴입고 있었다는 걸 고려해야겠지만)

처음 제대로 먹어본 남아공식 BBQ 브라이

매끼 식사도 생각보다 훌륭했다. 첫날 저녁은 브라이(남아공식 BBQ)였는데, 소고기 스테이크 한 장과 커다란 소시지 하나, 그리고 덥힌 야채 등이 나왔다. 소고기 스테이크라고 레스토랑의 고급스러운 버전을 상상하면 안 되고, 우리나라에서 캠핑 가서 고기 굽는 걸 떠올리면 얼추 어떤 이미지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날 저녁에는 비프 라자냐와 타조 스튜 등이 나왔다. 타조가 굉장히 비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굉장히 부드럽고 맛있었다. 사진은 어두워서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외에 샤워실이나 화장실도 제법 쾌적했고, 시설 내에 있는 매점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물부터 와인, 맥주, 고기, 장작, 통조림 등 캠핑에 필요한 건 다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심심한 입을 달래줄 젤리와 'save our rhino' 스티커, night drive를 위한 손전등을 샀다. 손전등은 밤 사파리보다는 새까만 어둠을 뚫고 화장실에 가는 데에 쓰였지만...


요하네스버그에서 크루거로 간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총 다섯 명이었다. 1년짜리 여행의 절반 정도에 다다른 네덜란드 동갑내기 여자애, 두바이에서 일하다가 출장 왔다는 터키 언니 그리고 길쭉길쭉 시원시원한 캐나다 커플과 2박 3일간 사파리를 함께 했다. 그 외에도 락밴드 하다가 왔을 것 같이 생긴 캘리포니아 선생님 세 명과 오스트리아 근처에 산다는 독일인 여자애도 일부 구간에서 합류했다.



두바이에 산다는 터키 언니가 오자마자 한 일은 매점에 가는 것이었다. 매점에서 와인 한 병과 캐슈너트 한 봉지를 사 오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도 생각 있으면 와! 같이 와인 마시자"


터키 언니가 말했다. 두바이는 허가받지 않은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라며, 밝은 대낮에 햇빛을 받으며 야외에서 술을 한 잔 하다니 너무 행복하다고 하였다.

  


복불복 BIG 5

인생에 운이 작용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 남아공 빅 5를 보는 것도 개인의 운에 달려있다. 2박 3일을 와서 빅 5를 다 보고 갈 수도 있고, 정-말 재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보고 돌아갈 수도 있다고 한다고는 하지만 설마 그 정도로 재수 없기는 힘들겠지


Big 5는 사자, 코끼리, 버팔로, 표범, 코뿔소이다. 나는 이 중 사자를 못 보았지만, 나와 함께 사파리를 갔으나 첫날 Night Drive가 아닌 Sunset Safaris를 한 사람들은 저 다섯을 다 보았다.

동승한 일행이 찾은 표범


사파리 차에 같이 탄 사람들이 동물들을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도 정말 중요하다. 운전자가 운전을 하면서 매의 눈으로 동물들을 찾아내기는 하나, 탑승자 모두가 동물을 찾아야 한다.


달리는 차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운데, 계속 집중하면서 누런 풀과 회색 바위, 초록 잎들 사이 곳곳에 랜덤 하게 숨어있는 동물을 찾는 건 사냥 본능을 잃어버린 나 같은 인간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이 전에 라이언파크에서 보고 온 사자만 못 보고 나머지 빅5를 다 보긴 했지만, 크루거 공원의 시시각각으로 다른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꼭 빅5를 다 보지 못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보다는 강렬한 태양에 하늘이 빨갛게 물드는 일출과 일몰의 모습, 밤에 텐트 앞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는 하늘에 빼곡한 별을 카메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딱히 동물을 아주 좋아하거나, 동물의 왕국 애청자가 아니였는데도 사파리에서 야생동물을 만나는 것은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길 중간에 무언가가 서있어서 보았더니
이 친구가 한참을 서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 사파리는 유난히 동물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덜 추운 것 같기도 했다.


알고보니 밤새 불이 났단다. 서서히 해가 뜨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까맣게 탄 땅은 밤새 불이 탔다는 것을 알렸다. 평소보다 덜 춥다고 느낀 것도 밤새 난 불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였다.


이런 곳은 한 번 불에 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나는 듯하다. 차로 몇십 분을 달려도 타지 않은 땅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지역이 불에 탔고, 대부분의 동물들은 불을 피해 멀리 도망간 듯했다.


새까맣게 탄 땅위에서 발견한 것은 코끼리와 얼룩말뿐이었다.



불이 난 다음날 홀로 남은 얼룩말


크루거 국립공원은 정말 크다. 한번 나가면 서너 시간씩 돌고 오는데도 지도상으로는 크루거의 구석에서 조금 움직이는 정도밖에 안 되었다.


티비가 아닌 두 눈으로 직접 이렇게 넓은 초원과 그곳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을 보게 될 줄이야.


그제야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자란 친구들이 왜 도시의 삶을 답답하다고 느끼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을 서울에서 자란 도시 촌놈이다. 폴란드에 가서 산이 아닌 숲을 보기 전까지는 '숲'과 '산'은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바르샤바의 넓은 평지에 나무가 우거져있는 광경은 너무 생소했고, 숲이지만 산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충격을 받았었던 적이 있다.


크루거 국립공원 사파리도 바르샤바 숲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연에 대한 개념을 바꾸고 확장시켰던 것처럼 초원에 대한 막연하던 이미지를 구체화시켰다.


아프리카에 오지 않는다면, 요하네스버그 도심에만 있었다면, 결코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을 보고 왔다. 누군가는 인생에 단 한번도 보지 못할 곳을 2박 3일이나 보고 오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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