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9)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주인공 '맨발'은 시대극(사무라이물)를 좋아하는 영화부 부원이다. 연간 한 편만 찍을 수 있는 영화부 예산으로 시대극을 찍고 싶어 했지만, 부내 투표에서 아마도 본인의 표일 게 분명한 단 한 표만 득표하고 말았다. 맨발의 시나리오 대신 채택된 것은 교내 인기 스타 카린의 로맨틱코미디물이다.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싫어하는 맨발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으려 한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으니 우리끼리 찍어보자,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는 좋은 친구들이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인공을 맡기고 싶은 배우는 없는 것이 큰일이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영화관에 간 맨발은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내 배우'가 그대로 현실에 나온 것 처럼 생긴 린타로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 친구에게는 비밀이 있다.
사실 린타로는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고, 영화감독 맨발의 열성적인 팬이다. 린타로의 시대에는 이미 영화라는 장르가 수명을 다했다. 그의 시대에는 남아있지 않은 맨발의 첫 작품 <사무라이의 청춘>을 보기 위해 과거로 여행을 온 것. 미래의 인간이 과거에 개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맨발의 적극적인 출연 구애를 거절하지만 린타로가 출연하지 않는다면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으름장(!)에 팬 된 도리로서 하는 수 없이 <사무라이의 청춘>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된다.
겨우 주연 배우를 확보한 맨발과 친구들은 조명, 사운드, 보조 카메라 등 촬영장 스텝 모집에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사무라이의 청춘> 프로젝트를 함께할 맨발단이 완성되는데 휴대폰과 짐벌을 이용해 촬영하거나 자전거 페달을 돌려 조명을 비추는 등 간신히 구색만 갖춘 정도다. 스텝들이 단체복까지 갖춰 입을 수 있는 카린의 제작환경과는 여러 모로 비교되는 환경이다. 하지만 친구가 될 수 있는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보이던 아이들은 오히려 그래서 더 즐겁게 영화를 만들어나간다.
영화의 전반부까지를 이끄는 큰 줄기가 카린과의 대결구도, 이와 함께 진행되는 맨발의 첫 영화 촬영기였다면 중반부터 결말까지에는 맨발의 내면이 조금 더 중요하다. 여느 십대처럼 린타로도 비밀을 숨기는 데 능하지 못하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고 그래서 곧 떠나야 한다는 것도, 미래에는 영화가 사라진다는 사실도 맨발에게 이실직고하고 만다. 이에 맨발은 크게 동요한다.
이 영화의 결말까지 맨발을 추동하는 가장 큰 동력은 '영화가 없어진다는 것, 린타로는 떠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할 거야!' 하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겠다는 마음은 정말 귀하다.
(영화 <컨택트>의 10대 버전 아닐까? 끝날 때의 고통을 알면서도 하는 거, 그게 사랑이야. 그리고 드라마 <내이름은 김삼순> 명대사-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맨발의 이런 이런 마음가짐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카린이다. 맨발은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는 물론 카린의 영화까지도 평가절하해왔지만 서로가 서로의 영화를 찍는 데 도움을 주면서 그의 창작세계도 이해하게 된다. 전반부까지 카린은 '늘 늘 헤실헤실 웃고 다니며 사랑 타령만 하는 귀여운 여자아이'로 납작하게 비춰졌는데, '승부하지 않는 주인공은 보고 싶지 않아!'라는 대사 한 마디로 어엿한 감독/작가가 된다. 가볍고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편집하는 부실 시퀀스는 여러 컷을 짧게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편집에 소요되는 긴 시간을 압축했다. 스크린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카린과 그를 추종하는 부원들이, 오른쪽에는 맨발과 그의 친구들이 앉아 있다. 이 숏들은 쭉 같은 앵글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맨발이 왼편으로 넘어가 함께 카린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감상한다. 가상의 경계선을 넘는 이 연출은 맨발이 카린의 창작세계를 이해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테다. 그런데 왜 가운데서 만나는 것도 카린이 이동하는 것도 아니라 맨발이 카린쪽으로 이동해야만 했을까?
첫 작품을 만드는 중인 맨발과 달리 이미 몇 편의 영화를 만든 어엿한 감독이었던 카린은 넓은 세계의 소유자다.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가장 좋아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시대극 요소를 섞고 싶어 하기도 하고, 캐릭터에 대한 확고한 철학도 있다(주인공은 승부해야 해!). '그런 걸 왜 좋아해?' 하는 류의 의문은 전혀 보이지 않는 천연스러운 얼굴로 맨발에게 '너는 시대극을 좋아하지'하고 물을 때부터, 이미 카린은 맨발을 또 다른 창작자이자 감독으로 인정하고 있던 것이다. 무언가 진심을 다해 만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것을 쉬이 평가하지 못하는 법이다. 맨발은 이때 작가의 세계로 성큼 전진했다.
맨발이 라이벌로 생각했던 카린과 카린의 작품은 결말부에서 맨발의 영화와 합쳐진다. 영화 장르에 대한 고민과 린타로에 대한 고민으로 창작활동에 집중하지 못 하던 맨발은 자신이 촬영한 결말을 탐탁치 않아 했다. 급기야 교내 상영회 중간에 상영을 중단시키고 즉석에서 결말을 찍겠다며 주연 배우로 나서는데, 이 장면에서 린타로와 보여주는 액션은 잘 짜인 로맨스다. 시간여행을 온 썸남(?)과 더블 주연으로, 관객들 앞에서 검 대신 빗자루로 검술 연기를 하는데 실은 이게 다 못 찍은 영화의 결말이라니. 영화는 연극과 합쳐지고 시대극, 로맨틱코미디, SF라는 장르도 모두 혼합됐다. 무려 5개의 장르를 섞어버리는 과감한 시도.
그래도 영화 속 상영회 관객들의 입장을 조금 고려해보자면, 이 일회적 즉흥극을 영화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가장 바깥의 관객인 나로서는 소녀무사의 액션을 흥미롭게 즐겼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의 가장 훌륭한 미덕은 무언가를 처음 좋아할 때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그것을 방해하려는 악역 없이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에 담았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보는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미워할 것이 없는 세상의 날씨는 언제나 이 영화의 톤처럼 맑고 쾌청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