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한 애정고백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것을 밝혀야겠다. 많은 관객이 그렇듯 크리스토퍼놀란과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흔히 평단의 극찬을 받는 영화는 대중이 외면하고 큰돈을 버는 영화는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데 놀란은 놀랍게도(!) 평단에서도 대중에게도 주목받는 희귀한 유형에 속해 있다. 예술이기도 하지만 상업이기도 한 영화의 특성을 생각할 때 놀란은 작품을 잘 만드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독보적인 제조업자이기도 하다. 예술성과 대중성(즉 상업성) 사이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개인적으로 놀란은 좌뇌만으로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표상처럼 보인다. 이 점은 후술할 놀란의 영화가 갖는 특징과도 일맥상통하지만 그의 영화에서는 절대로 감정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그럴 수 없기도 하다.) '예술가', '작가'라는 단어에서 얼핏 느껴지는 어떤 섬세하고 예민한 성질, 나뭇잎 한 장에 눈물 흘리거나 구름 한 점에 폭소를 터트린다든가 하는 민감한 성정이 그의 이름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나뭇잎이 떨어지는 궤도를 분석해 영화의 구조에 적용하거나, 구름이 특정한 형태를 만드는 모습을 CG 없이 어떻게 촬영할지 고민하는 것이 그가 할 법한 일이다.
복잡한 건물의 설계도면 같은 구조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경탄을 자아내게 만드는지, 형식이 작품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하는지, 둘의 상관관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렇게 형식과 내용이 일치할 때 작품이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그의 영화를 보며 알게 됐다. (서술어로 '느꼈다'가 아니라 '알게 됐다'를 선택한 것은 물론 놀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특히 좋아하는 점은 이런 것들이다. 먼저 관객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플롯. 이 점이 가장 부각되는 영화는 역시 <메멘토>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와 플롯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둘 사이를 차안과 피안만큼 벌리는 것은 감독-작가의 역량이기도 하다. 놀란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느끼게 되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지적 유희는 이 특징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구조.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놀랍다는 말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 한다. 예를 들자면 <덩케르크>가 가장 좋겠다. 상공과 바다, 잔교의 시간이 각기 다르게 흐르게끔 설계한 의도와 목적은 물론, 관객도 그것을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든 연출은 그의 뛰어난 역량이 없었다면 실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덩케르크>는 캐릭터의 감정을 배우의 표정이나 행동이 아닌 그들이 등장하는 시퀀스의 길이, 음향 효과, 카메라 앵글 같은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은 시종일관 무표정하거나 무언가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들이 겪는 사건을 함께 체험하고 같은 시간감각을 느낀다.
아마 가장 빛나는 특징일 것 같은 독창적인 설정도 빼놓을 수 없다. 꿈을 통해 생각을 주입한다는 <인셉션>의 설정과 그 설정을 그대로 형식화한 영화의 다층 구조,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는 <테넷>과 그 촬영방식 같은 것들이다. 놀란은 음이 계속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처럼 들리는 착청현상 '셰퍼드톤'의 원리에 기대 <덩케르크>를 만들었다. 그는 플롯을 기하학적으로 잘 배치해 긴장감을 계속 고조시키겠다는 야심찬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기어코 성공했다. 셰퍼드톤을 영화 사운드에 이용한 건 당연지사다. 이렇게나 끊임없이, 지금까지 영화사에서 보지 못 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감독의 영화를 기대하지 않을 도리가 내게는 없다.
마지막으로 놀란이 갖고 있는 확고한 윤리의식. 명실공히 그의 영화를 안심하고 즐기게 하는 장점이다. <다크나이트>에서 조커가 죄수와 시민을 각기 다른 배에 태우고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아넣었을 때 놀란이 선택한 결과는 두 집단 모두 서로를 죽이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일부 혹평을 받기는 했지만 <인터스텔라>에서도 <테넷>에서도 놀란의 윤리관은 변하지 않았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인류가 찾아야 하는 답은 결국 사랑에 있음 보여주었고(만 박사와 에드먼즈-아멜리아 브랜드를 가로짓는 결정적인 차이) <테넷>에서는 마지막 미션-죽음-을 수행하러 떠나는 닐에게 스탈스크 작전의 공을 돌리고 영화가 줄 수 있는 빛나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오이디푸스 그 자체인 닐에게 단단히 반했는데, 로버트 패틴슨을 이렇게 멋지게 보여줄 영화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덩케르크>는 수많은 2차 대전 이야기 중 하필이면 바로 그 사건을 선택해 영화화했다는 사실부터 놀란답다고 느꼈고, 수많은 익명의 배가 덩케르크로 향하는 장면과 주인공이 영국으로 귀환한 뒤 맹인이 담요를 나눠주는 장면에서는 놀란의 영혼 일부를 엿본 것 같았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과 맹인이 주고받는 대사는 놀란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대사다-"Well done, lads. Well done." "All we did is survive." "That's enough.")
애정을 증명하기 위한 서두가 길었다. 이 애정고백을 반대로 뒤집으면 정확히 <오펜하이머>에 대한 불평이 된다. 그를 조금 흉내내보기 위해 마지막부터 거슬러 올라가볼까.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 오펜하이머에 대해 영화가 취하는 태도는 '알 수 없음'이다. 영화는 그의 천재성과 정치적인 입장, 애정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설명하고 보여주면서 가장 중요한 맨해튼 프로젝트-그러니까 원자폭탄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는 미결정으로 일관한다. 물론 실존인물인 오펜하이머가 말년에 입장을 바꾸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극화할 때는 일정 정도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결론이 판단 유보더라도 말이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결정하는 것과 그조차 하지 못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껏 감독한 영화를 통해 그의 인류애와 휴머니즘을 조금은 가늠해왔기에, 놀란이라면 이에 대해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궁금해지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작품의 어떤 점이 놀란의 마음을 잡아끌었는지가 말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난 뒤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입장을 바꾼 그의 모순이 영화를 만들게 한 최초의 원동력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개인이 갖는 모순 즉 한 인물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는 놀란이 지금까지 만들어보지 않은 이야기이자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을 생각할 때 특히나 취약할 수밖에 없는 장르다. 늘 독창적인 발상과 설정에서 출발한 놀란의 영화들과 출발점부터 다르니, 어쩌면 이 영화는 놀란에게 지금껏 만든 어떤 작품보다 더 크고 어려운 도전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에 집중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한 판단은 관객 여러분께 맡깁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면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사이를 오간 대화도 차라리 보여주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는 '판단할 수 없다', '판단을 보류한다'는 입장조차 취하지 못 한 채,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을 멀리서 바라보는 루이스 같은 위치에 머문다. 이걸 잘 만든 전기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연출의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많다. 프로젝트가 성공한 뒤 연단에 선 오펜하이머가 느끼는 혼란(프로젝트 참여자가 발을 구르고 오펜하이머가 폭탄이 터진 뒤의 환영을 보는 시퀀스)이 과하게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표현되었다. 루이스 스트로스의 오해를 부른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사이 대화 또한 앵글만 달리해 여러 번 반복되어 긴장감을 해쳤다. 실제 역사가 아닌 영화의 상상력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반복, 강조돼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과하게 직접적인'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진 태틀록과의 애정씬에서 그가 하는 결정적인 대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는 이미 많은 관객의 비웃음을 샀고, "침대보를 걷어"와 "침대보를 걷지 마"로 이어지는 복선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대사는 진행의 동력을 갉아먹었다. (그가 취조를 받다가 수화기를 들었을 때 '침대보를 걷지 말라고 하겠군'이라고 생각한 관객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서겠지만 힘을 잔뜩 준 음향효과와 음악도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관객이 이야기하는 '너무 길다', '보기 힘들다'는 평은 필요 없는 반복과 음향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취조실에서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사람들(절대다수가 백인 남성인) 사이로 벌거벗은 진 태틀록이 오펜하이머와 정사를 벌이는 씬에서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오펜하이머가 치부를 까발려진 심정이라는 것을, 아내인 키티가 느낀 배신감을 꼭 그 방식으로 보여줘야만 했을까? <덩케르크>에서 배우의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고도 감정을 잡아채던 놀란은 어디로 갔을까?
이쯤에서 잠시 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놀란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Dead Wives Issue'라는 이름까지 붙여졌을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다. 놀란의 영화에는 여성 주연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하더라도 죽거나 망가진 아내로서 주인공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거나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메멘토>, <프레스티지>, <다크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 이번 <오펜하이머>까지가 그 예시다.
감독으로서 놀란은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다루고 보여줘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좋게 굴려 말하자면 이성을 대하는 데 영 쑥맥인 소년처럼 보인다. <덩케르크> 같은 영화는 전쟁 중이라는 설정 상 여성이 등장할 여지가 적었기 때문에 부재에 대해 합리화할 수 있고, 오히려 이로 인해 그의 결점을 상당 부분 가릴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에서는 과감히 결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해쳤다.
<오펜하이머>는 3중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시간순으로는 오펜하이머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하다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 사건, 프로젝트가 끝난 뒤 보안 갱신과 관련된 청문회에 출석하는 사건, 마지막으로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에서 그에게 누명을 씌웠던 루이스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청문회 사건이다. 영화에서는 각 사건이 교차적으로 제시되고 컬러와 흑백으로 시간대를 표현했다. 놀란은 지금까지 성공했던 전작의 형식을 비슷하게 가져왔는데, 문제는 그런 형식을 취할 만한 합당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작의 구조가 호평받았던 이유는 그 독창성은 물론,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종국에는 '이 이야기이기 때문에 바로 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내지는 '바로 그 형식으로 말미암아 그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하는 류의 일체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와 형식은 도자기와 그 안에 들어있는 물과 같은 관계라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모양이 바뀌면 다른 하나의 모양도 바뀐다. <오펜하이머>의 가장 큰 패착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놀란의 기존 스타일로 보여주기에는 이야기가 단순했고, 한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기에 놀란은 형식에 대한 욕심이 많다.
그렇다고 <오펜하이머>는 장점이 전혀 없는 영화인가 하면 쉽사리 긍정할 순 없다. 이 영화에서 빛나는 점은 단연 배우의 생명력이다.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킬리언 머피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에밀리 블런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어떤 영화에서도 유달리 튀어 보이는 플로렌스 퓨만의 독특한 에너지를 극 안에 안정적으로 안착시킨 점도 감독의 역량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우주 또는 미립자의 아름다운 세계를 아이맥스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동시대인만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길게 불평했지만 그래도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기대할 것이다. OTT의 시대에 스크린의 힘을 보여주는 감독 중 한 명이기 때문이고, 그의 약점은 몰라도 그의 장점은 사랑해 마지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배신감과 눈이 번쩍 뜨이는 흥분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이전과 이후를 같지 않게 만드는 많은 것들 중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름도 분명히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