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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교진 Sep 26. 2017

지금은 음모론의 시대

[스물일곱 번째 책] 전상진의 '음모론의 시대' 

청년은 일자리 때문에 힘들어 하고, 부모 세대들은 은퇴 후 노후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중소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안 되어 애가 타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안타깝고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통과시켜주신 크라우드펀딩법과 관광진흥법 등 경제활성화 관련법은 현재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면서 국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대 국회에서는 이런 민생과 직결되는 법안들이 좀 더 일찍 통과되어 국민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6년 6월13일 박근혜 대통령의 20대 국회 개원연설이다. 찾아보면 이 개원연설이 있기 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강남역 인근에서 한 남성이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23살의 한 여성을 살해했고, 19살 청춘이 들어오는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 구의역 사고가 있었다. 외딴 섬 관사에 머물던 여교사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했지만 그동안 은폐되었던 여성 차별, 위험의 외주화 등의 모습들을 들춰냈다. 국민들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고통을 포스트잇을 통해, 또는 시민 필리버스터를 통해 표현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개원연설 내용 중에는 이러한 '고통'을 덜어줄 정치적 장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음모론의 시대>에 따르면 고통을 덜어줄 장치가 부재한 사회에서는 음모론이 판을 친다.


고통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한다.


전상진이 쓴 <음모론의 시대>는 음모론이 성행하는 이유로 '고통'을 지목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통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한다. 설명은 그 까닭을 밝히고 죄인을 쫓고 책임자를 색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굶주림은 고통스럽다. 모두가 굶주리면 상관없지만, '열심히 일하는데 왜 나만 굶주리지?' 등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고통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고통을 설명하며 혼란을 관리하는 역할은 전통적으로 문화,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 등이 맡아왔다.         

 

고통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까닭을 알려줘 고통에서 비롯한 감정적이며 도덕적인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하지만 혼란의 시대에서 정치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했다. 정치가 지목하는 고통의 이유가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불안의 공포의 사로잡혔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 같지만 2016년, 우리가 유독 불안해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고통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이유라는 것은 ‘자생 방법’ 또 다른 이름으로는 ‘음모론’으로 불린다.       


음모론이 자리를 꿰찬 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목함지뢰 사건으로 북한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SNS에 대한민국 국방부가 보냈다는 설명과 함께 "전쟁이 선포되면 만 21세에서 33세 사이 남성은 즉각 소집에 응해야 한다"는 문자메시지 내용이 올라왔다. 그리고 메르스 사태 당시, SNS를 통해 숨만 쉬어도 감염 된다는 내용을 비롯해 메르스 치료병원으로 지정된 병원 이니셜이 언급되며 병원 내부소식이 스마트폰 등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이외에도 일상적으로(?) 사회·정치적으로 반향이 큰 사건이 일어날 때면 연예인 스캔들이 시간차를 두고 터지는 것에 대해 네티즌들은 사건을 덮기 위한 것이라는 일종의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없으니 섣불리 믿으면 안 된다. 안정적인 것이 희소해졌으니 조심해야 한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면밀하고 신중하게 둘러봐야 한다. 음모론은 편집증에 걸린,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적합한 세계의 관찰 방법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음모론이 힘을 얻고 퍼져나간 이유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었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는 정부가 독점한 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터진 지뢰, 휴전선 인근 포화 소리였다. 생명에 대한 위험이 난생처음 실감되는 때에 정부는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확인되는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국민이 체감하는 불신과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불어갔지만 국가는 그 당시 국민들의 감정, 느낌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 행동 등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나온 게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정치적 메시지, 행동이 부재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적합한 세계 관찰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스스로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생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유언비어로 보고, ‘자, 우리 진정하고 한 번 믿어보자.’ 하는 태도로 이 음모론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러기 힘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음모론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실제 몇몇 사례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전 세계를 도감청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 정부를 음해하려는 거짓 정보에 불과했지만 후에 내부 고발자의 폭로로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이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을 두고 혼란을 일으키는 부정 세력이라고 처음에는 간주했지만 지금 서서히 그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음모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음모론은 그저 사실과 동떨어진 거짓이나 흥미를 위한 가십이 아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의견, 의혹, 새로운 비판이론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전상진의 <음모론의 시대>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해 집중 조명한 책으로 음모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음모론이 판을 치는 사회가 피곤하다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Q. 음모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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