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여행 이틀 차, 보고타 몬세라테 언덕

by 목짧은두루미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는 해발 2,600m에 위치한 안데스 산맥의 고원 분지다. 남미 여행을 고민하게 되는 수십 가지 이유들 중 하나로 고산병이 꼽히는데, 보고타부터 여행을 시작하면 약한 고산부터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셈이라 나름 서서히 적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비행기에서 내렸을 땐 별다른 이상증세가 없었고, 친구 집에 도착해 신나게 맥주를 마시고서야 이곳이 고산이라는 것이 조금 실감이 났다. 심장이 너무 뛰어 작은 캔 하나도 채 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의 국민 맥주 격인 '클럽 콜럼비아'는 라거 맥주로, 언제든 가볍게 마시기 좋은 맥주였다.


IMG_5700.jpg 맥주와 어울리는 옥수수 과자. 맛있어서 혼자 다먹었다.



해발 3500, 몬세라테 전망대

해발 2,000m부터 고산지대로 분류되는데, 몬세라테는 해발 3,200m에 위치하니 본격 고산이라 할 수 있다. 케이블카 혹은 열차를 통해 몬세라테 성당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몬세라템 행 케이블카

케이블카를 타고 성당에 도착하니 보고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잡힐 것 같이 높은 곳에 올라와 시내를 내려다보니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보고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지 않은가. 가이드가 되어주신 남편 친구분은 앞으로 남미 여행하며 둘이서 사진 찍기 어려울 거라며 부부샷을 찍어주셨다. 한국이었다면 카메라를 난간에 올려놓고도 찍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부탁해서도 찍을 수 있지만, 여기서 그런 행동은 "내 카메라 가져가세요~"하고 말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IMG_5818.jpg 앞모습보단 뒷모습에 자신 있는 부부
20171027_121104_HDR.jpg 영원히 찍는법을 마스터할 수 없는 파노라마샷


20171027_120640_HDR.jpg 몬세라테 성당과 보고타 전경

사진첩을 뒤적이다 보니 경치에 정신이 팔려서 전망 사진만 많고 정작 성당 사진이 없다. 성당이 반쯤 보이는 위의 사진이 전부. 내가 얼마나 성당에 관심이 없는지 새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담한 성당 내부에서도 도무지 무얼 구경(?)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기도하는 척 소원을 빌어보고 나왔다.

성당에서 나오면 예수가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히는 과정인 '십자가의 길'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이 쭉 나열되어있는 산책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돌길 위에 정원처럼 꾸며져 있는 예쁜 공간이었지만 내 사진첩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왜냐하면 고산병이 시작되었기 때문. 아주 미세한 경사인데도 숨이 헐떡헐떡 차오르는 느낌이었는데, 이때만해도 고산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좀 피곤한다고 생각하고 견디던 찰나 십자가의 길이 끝나고 전통시장으로 이어졌다. 인심 좋은 콜롬비아 아주머니가 권하던 소시지 비주얼의 고기를 보자마자 바로 우웩! 하고 구역질이 났다. 입덧일 리는 없으니 이건 분명 고산병이다. 구역질을 2회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나의 증상(?)을 일행에게 고백하고 황급히 언덕을 내려오...려 했으나 케이블카 줄이 어찌나 길던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숨이 답답한 긴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서야 내려올 수 있었다. 미니 고산병을 체험하기에 좋은 몬세라테 언덕이었다. '미니'고산병인 이유는 내려오면 바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는 쿠스코의 고산병이 후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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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깊숙이 위치한 작은 예배당


집순이 여행자

몬세라테 언덕에서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폭우가 내렸다. 정말 하늘이 쪼개질 것 같이 강한 빗줄기가 이어져 우리는 집에서 놀기로 했다. 남편 친구분의 집은 진정 어른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각종 보드게임, 공놀이, 비디오게임 등이 갖춰진 곳.

저 게임이 스트리트 파이터였던가? 첫 경험에 카포에라로 두 남자를 무찔렀다. 표정을 봤을 땐 져준 것은 분명 아니었다. 포커도 배웠다. 사실 포커는 여전히 못하니 포커를 배웠다기보단 탕진을 배웠다고 하는 쪽이 맞다. 무슨 가정집에 칩을 보유하고 있나 의아하다가도 재밌게 놀다보니 이래서 이걸 집에 사두셨구나 싶었다. 탕진은 재밌다. 하지만 탕진의 대가로 설거지에 당첨되는 불행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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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비디오게임 등 각종 놀이시설을 구비한 친구집

보고타에도 한국식당이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배달도 해준다는 점. 신나게 게임을 하다가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켜먹었다. 한국에서 먹던 맛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컵라면만으로는 타국의 음식들이 주는 그 미묘한 공허와 느끼함을 채울 수 없다.

IMG_5826.jpg 배달시켜 먹은 한식. 진정 배달의 민족


술을 못 마시는 편이지만 여행 오면 홀짝홀짝 맛보는 것이 재미 아니던가. 저 초록색 팩의 nectar는 사탕수수로 만든 보드카라 하는데, 여기선 우리의 소주처럼 저렴하게 즐기는 술인 것으로 추정된다. 솔직히 맛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인스타그램에 남겼던 표현에 의하면 '고무 맛 소주'같았다고 한다. 다시 가면 안 마셔도 될 것 같다. 두 번째는 테킬라. 테킬라 한 잔 마시고 손에 미리 묻혀둔 소금을 핥아먹는 방식으로 처음 테킬라를 소개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손을 빨아먹는 방식이 영 내키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날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었다. 라임을 작게 잘라 한 면에는 커피가루, 다른 한 면에는 설탕을 묻히는 것. 테킬라 한 잔을 들이키고 커피와 설탕이 묻은 라임을 쪽 빨아먹으면 쓰고 시고 단 맛이 모두 들어있는 한 입이 완성된다. 똠양꿍도 저리 가야 하는 맛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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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니 관광 명소에 가는 것에 대한 열망이 별로 없는 편이다. 여행책에 나온 곳에 가도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좋은 경우는 드무니까. "집에 쳐박혀서 게임이나 할거면 뭐하러 여행을 가"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 있든 밖에 나가든, 여행지에선 평소에는 닫혀있던 감각들이 열린다. 조금 더 사색하고 조금 더 감성적이게 되는 건 확실하다. 여행이 있기에 일상이 소중하고, 일상이 있기에 여행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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