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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란 Feb 03. 2021

오늘의 커린이1

#아침에는일기를

걸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독일 마을이 우리 동네, 대구에 생겼다. 마을 이름 뒤에 'espresso bar'라고 적힌 B카페는 한산한 주택 가에 있는 8평 남짓 공간으로 10년 넘게 커피를 해온, 독일 마을에는 딱 한 번 가본, 덴마크의 샤갈이라 불리는 예술가 카를 헤닝 페데르센의 말을 인용하는 남자가 운영한다. 물론 내가 그와 나눈 대화라고는 "라떼 한 잔 주세요", "영수증 드릴까요?" 정도가 전부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우리 동네에도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생기나 봐"

네이버 우리 동네 탭에서 B카페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는 맨 먼저 로마를 추억했다. 3년 전 로마 여행에서 에스프레소의 매력을 보았다. 내가 본 장면은 고전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그들의 옛날과 지금이 동시에 담긴 모습이었는데 문화라는 단어로 퉁쳐서 해석하기는 싫은, 낯설지만 친근한 매력이었다. 가장 비슷하게 떠오르는 우리의 이미지는 아침 지하철역 가는 길에 파는 천 원 김밥을 사서 그 자리에 서서 얼른 먹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출근길 사람들.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무의식을 가진 우리처럼 그들은 아침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몸 안에 털어 넣어야 하루가 시작되는 다른 종(type) 같았다. 로마를 걷게 된 기념으로 나는 머무는 동안 하나의 리추얼처럼 아침 공복에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려 노력했다. 분명 노력이었다. 카페를 나오자마자 옆에 있는 젤라또 가게에서 리조(riso)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으니까.


그리고 작년, 동성로 근처에 생긴 로스터리 바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울 약수역,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있는 동네로 유명한 그곳에 하루 400잔씩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R카페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지 얼마 안 있어 대구에도 진한 에스프레소를 전문으로 하는 로스터리 카페 D가 생겼다. 쌀 소비가 급격히 줄었다지만 그 자리를 에스프레소가 차지하게 될 줄은,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에스프레소를 한 명이 두세 잔씩 마시고 그 잔을 쌓아 올려 사진을 찍어댔다. 그 사진을 본 우리는 곧장 달려갔지만 줄을 섰다(오픈 일주일 만의 일이다). 인당 두 잔씩 마신 후 SNS에 나온 것과 비슷하게 기념사진을 남겼다. D카페의 비밀은 설탕, 크림, 코코아 파우더의 황금 비율에 있는 듯했다. 이렇게 달고 맛있는 커피라면 심장이 팔딱팔딱 뛰지 않을 때까지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동네에도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생기나 봐"라는 말은 D카페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에스프레소를 맛 볼 요량으로 B카페에 갔는데 가게 안에 공기보다 이산화탄소 비율이 높은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그다음에 갔을 때도 마스크 쓴 사람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찾아보니 B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는 에스프레소가 아닌 마을 이름을 딴 슈페너, 죽처럼 걸쭉한 땅콩크림이 올라간 크림 커피였다. 한국어로만 표현 가능한 맛 표현을 선보이며 카페 성지로서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달지 않아서 맛있는 마카롱', '안 달아서 맛있는 케이크'처럼 달지 않은 단맛으로 우리의 칼로리 셈법을 단숨에 무력화시켜버리는 음식들처럼 B카페의 슈페너도 '많이 달지 않은 극강의 고소함'으로 이 동네, CGV와 이마트, 홈플러스, 백화점도 있는 동네의 커피 마니아들을 불러 모았다.


하필이면 코로나 시국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카페 이름이 독일 마을인 탓에 급기야 사람들은 B카페를 여행지 삼기 시작했다. 나 오늘 도쿄 감, 나 다음 주에 파리 감. 하는 사람들처럼 너도나도 여행 가는 사람처럼 그곳에 갈 것을 예고하고, 그곳에 줄을 서고, 커피를 사서 차에서 마셨다. 코로나 거리두기 조치로 테이크 아웃만 되는 기간이었는데도 공항 입국 심사장처럼 긴 줄이 생겼다. 여행이란 자고로 '기분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나 내일 B카페 갈 거야"

달지 않은 고소함에 빠진 동네의 숨은 커피 마니아가 여기 한 명 더 있다. 20분 거리이니까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픈 시간 맞춰서 다녀와야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설마 하는 일은 대부분 일어난다. 휴무였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땅콩 크림 라떼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도미노 블록처럼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이라 하나의 결심이 무너지면 오늘이 전부 무너진다. 앞 일, 앞사람, 앞 사건에서 받은 영향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하기로 한 게 있다면 실패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아침 열 시, 엊그제 밤에 본 유튜브 레시피를 다시 찾았다. 제목은 <땅콩 크림 라떼 만들기> 그리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다음 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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