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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ving Tree Aug 10. 2016

아이들의 사회성

친구들과 사이좋게 노는 것에 대한 편견

우리 집 대표님이 본격적으로 대표직을 맡게 되었을 때가 아마도 만 두 살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 일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스킬이 쌓여가면서 이 작은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제대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와 있을 때에는 세상이 자기 것인 양 통치해도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고 호감을 표현하기 바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대표님의 모습에 내심 흐뭇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표님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끔씩 일어났던 에피소드들은 있었다.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다닐 때 친구의 팔을 문 적도 있고, 머리를 때린 적도 있다. 미국에 와서 프리스쿨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선생님 나 얘 꼬집고 있어요”라고 스스로 자백하시며 그 와중에도 친구를 계속 꼬집고 있었던 웃픈 해프닝도 있었다. 가끔 학교에서 픽업하면 “엄마 나 오늘 OO랑 싸웠어.”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OO이가 미워. 안 놀 거야!”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런 행동을 한 배경과 동기를 살피기는 했지만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친구를떄리면 친구가 아프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 데잇을 할 때도 간혹 가다 몸싸움이 일어나면 바로 달려가기보다는 대게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편인데 철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바로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고 훈계하는 많은 어머님들 사이에서 참… 천하태평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나의 태도에 대한 변명 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글을 써볼까 한다. 


1.     아이들은 자라면서 다양한 종류의 또래 간의 상호작용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엄마 아빠의 보호나 슈퍼비전을 벗어나 자유롭게 친구들을 만나고 놀았다. 동네에서 자주 보는 친구들과 골목을 누비며 놀이를 만들어내고 그러다 말싸움을 하기도 하고 그것이 몸싸움으로 이어지고 다시 화해를 하기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아이들 스스로 겪으며 사회를 배우고 사회성을 배웠던 것 같다. 다방구를 하다가 말싸움이 나는 순간마다 부모가 끼어들어 양보를 해야 한다거나 친절하게 말해야 한다고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투고 밉고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을 깊이 느껴보고 그 감정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우리 어렸을 적 삶에 녹아있었던 것 같다. 함께 놀아야 즐겁고, 룰을 지킬 때 게임은 더 재밌어지며, 양보하거나 나눌 때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는 사실들을 싸워보고, 미워해 보고, 속상해 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2.     화가 나면 꼬집고 때리기도 하고 ‘내 거야’라고 으름장을 부리기도 하는 것은 유아기에만 허용되는 그리고 어쩌면 매우 정상적인 행동인데 그런 행동들을 다 경험해보기도 전에 ‘나쁜 것,’ 혹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해 버리면 아이가 아이다울 수 있는 시기를 빼앗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아기 때 충분히 느껴보고 아직 그 리스크가 작을 때 행동으로 옮겨봤던 아이들이 오히려 커가면서 남을 공격하면 안 되는 이유를 잘 배워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런 설명 없이 안된다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닌가….


3.     순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다 천사가 아니듯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다 악마도 아니다. 친절함도 공격적인 자세도 모두 사회성에서 필요한 전략들이다. 미국 캔자스 대학에 Hawley교수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친절함을 베푸는 친사회적 행동과 협박이나 폭력을 이용한 반사회적 행동을 적절히 섞어낸다고 얘기했다. 이 두 가지 행동을 적절히 사용하는 아이일수록 친구들에게나 선생님 에게인 기있는 아이일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회성이라는 것은 무조건 양보하고 참고 친절해야 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아이들에게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것보다는 왜 친절해야 하는지 스스로 동기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개인적인 나의 생각은 굳이 친절한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만…


언젠가 부터대표님은 늘 변신 로봇을 그렸고 그것들을 갖고 놀았으며 그들은 언제나 서로 몸을 부딪히며 공격하고 공격받고 찔리고 맞고 내팽개쳐지고 죽기를 반복했다.  심지어 어떤 시기에는 꿈에서까지 로봇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공격을 계속했다. 어느 누군가가 보면 ‘우리 아이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억눌린 감정이 이런 공격성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표님의 놀이에 언제나 악당이 되어 함께 공격하다가 죽기를 반복하는 그 지루하고 매력 없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가 이제 막 힘겨루기를 배우고 강자와 약자, 이기는 것과 지는 것 등의 사회 속 갈등 구조를 알아가기에 놀이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놀이와 그림 속에서 대표님은 우주 최강 로봇가 되어 총도 쏘고 칼도 부리고 나쁜 놈을 떼리고 부수고 물리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몇 년 전 히트를 쳤던 양육쇼크 (Nurture Shock)란 책에 아이들의 공격성을 연구하던 Jamie Ostrove박사와 DouglasGentile박사가 함께 ‘미디어가 프리스쿨 (2-5세)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대대적으로 연구한 결과가 실렸다. 파워레인저나 스타워즈 같은 공격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 프로그램과 그렇지 않은 혹은 덜 공격적이고 사회성이나 인성을 위한 교육적 프로그램을 구분하여 어느 쪽 프로그램이 아이들로 하여금 공격성을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놀랍게도 이 연구를 통해 교육적인 프로그램에 더 많이 노출된 아이들의 공격성이 조금 더 높게 측정되었다. 공격성에 있어서는 신체적 공격성, 관계에서의 공격성 그리고 언어적 공격성으로 나누어 측정했는데 공격적인 프로그램을 많이 본 아이들의 신체적 공격성은 예상대로 증가하긴 했지만 교육적 프로그램을 많이 본 아이들의 신체적 공격성 증가율보다 더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교육적 프로그램을 많이 본 아이들은 관계적, 그리고 언어적 공격성도 증가하였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들의 분석에 의하면 교육적 프로그램이 사회성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갈등구조를 소개하는데 이 과정에서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공격적 말과 행동이 대략 30분마다 7.7개씩 나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프로그래에서 이 갈등이 해소되는 데 사용된 시간은 갈등을 소개하는 시간보다 길지 않았고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공격적 말과 행동들이 언제나 적절한 해결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2-5세의 아이들은 또한 갈등의 과정과 결말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다는 분석도 있었다. 


아이들의 공격성을 차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좀 더 적절한 방법으로 충분히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오히려 공격성을 잘 다듬어가는 방법이 아닐까? 공격이란 것은 폭력과 달리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살면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어떤 것을 정복하기 위해,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해 공격적 자세를 취해야 할 때가 있다. 놀이를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격적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고 자신의 힘을 경험해본 아이라면 실제 생활에서는 굳이 공격적 에너지를 사용할 필요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남자아이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자아이들 또한 내재되어 있는 언어적 공격성과 관계적 공격성을 테스트해 보고 깊게 경험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놀이들이 필요하다. “친구한테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라기보다는 “OO이가 오늘은 공주 인형을 혼자서만 갖고 놀고 싶어 하는구나” 라던지 “네가 충분히 가지고 놀고 난 후에 친구한테 빌려주고 싶으면 빌려줘도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서너 살 아이들에게 자주 강요되는 양보나, 어설픈 친절이나 어쭙잖은 화해를 통해 그들이 배우는 것은 ‘착한 아이’에 대한 왜곡된 이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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