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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ving Tree Jul 22. 2016

부모의 한계를 인정하다

아이가 아플 때 느끼는 부모의 불안에 대응하는 전략

태윤이가 만 삼일을 고열에 시달렸다. 살이 닿지 않아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전신이 뜨거운 상태이다 보니 놀 기운도 생떼 부릴 기운도 없어 찬 바닥에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104도까지 찍어버린 고열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주 체온을 체크한다고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불안한 마음에 십 분마다 체온계를 들이대고 0.1도의 변화에도 민감해하며 지냈다. 대게 열이 날 때 지침은:

해열제를 먹이는 기준은 온도가 아니라 아이의 적응 상태이다.

 - 삼일 지나도 열이 내리지 않는다면 병원에 가야 한다.

 -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수분 섭취를 자주 해야 한다

 - 정해진 온도 이상이 되면 바로 응급실에 가야 한다.

생각해 보면 상당히 디테일하고 정확한 기준이다. 아이의 상태를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지만 사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이가 화씨 104도(미국 기준)를 넘느냐 아니냐, 그리고 만 삼일의 고열 상태를 넘기냐 안 넘기냐의 딱 떨어지는 숫자적 기준이 있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적절한 온도와 습기를 조절하며 열을 내리는 데 좋은 음식들을 해주는 것 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아프면 엄청난 호들갑을 떨게 된다.  지난밤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던 걸 후회해 보기도 하고, 아이가 여전히 손을 빠는 행동을 빨리 고쳐야겠다는 다짐을 해보기도 하고, 괜스레 “네 살 아이 열날 때”를 검색창에 수십 번 찍어보기도 한다. 아이의 회복에 전혀 소용이 없는 그런 잡다한 걱정과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사실 아이는 스스로 병균과 싸워 이겨내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태윤이가 이번 열감기 기간에는 유난히 자신의 열나는 상태에 대한 피드백이 많았다. 왜 열이 나냐며 묻기도 하고, 언제 열이 내리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열이 나는데 배가 아프다거나 다리가 아프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열이 나서 힘이 없어서 그런데 밥을 먹여주면 안 되겠냐고 묻기도 하고 아픈 아이가 나오는 책을 읽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아픈 아이가 나름대로 자신의 아픈 상태를 이해하고 버티려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대부분의 요구를 다 들어주며 잘 돌봐주었다. 아이의 몸속에 나쁜 병균이 들어와서 착한 병균과 나쁜 병균이 서로 싸움을 하느라고 몸이 뜨거워지는 거라고 말해주기도 하고, 배 생강즙을 먹일 때에, 착한 병균에게 에너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하니 인상을 잔뜩 쓰면서도 남기지 않고 다 삼켜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둘째 날에는 아이가 말할 기운도 없이 힘들어하길래 소아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윤이 담당 의사 선생님이 마침 휴가 중이시라 스케줄도 잡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지영언니한테 의논을 했다. 언니는 힘들어도 삼일만 기다려 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믿을 만한 사람의 경험담이 어떤 의사의 조언보다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만 삼일 끝에 태윤이는 땀을 내기 시작하고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컨디션이 많이 회복된 태윤이가 아침에 밥을 먹으며 “엄마, 드디어 착한 병균이 이긴 거지?”라고 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응, 우리 태윤이가 착한 병균 이기라고 밥도 잘 먹고 응원도 해주고 해서 정말 멋지다.” 라며 안아주었다. 내가 우왕좌왕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동안 태윤이는 스스로 견디고 회복하고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었다.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소중함은 왜 아이가 아플 때 극대화되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아이가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여 실망하고, 의심하고, 분노할 때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나는 부모라는 존재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잘못 이해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실제로 1900년대 후반 이전에는 Parent를 동사화한 parenting이란 단어조차 사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부모라는 단어는 원래 무언가를 해야 하는 동사가 아니라 아이에게 그 상태로 있어주는 명사였다. Parenting이라는 역할 중심의 동사가 파생되면서 역할에 대한 기준과 평가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Parenting은 각각의 부모들이 아이와의 관계에서 ‘각자의 성향에 따라 하는 행동 상태’가 아니라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와 관점이 달라졌다. 이에 따라 아이들은 좋은 parenting의 결과물로 평가되어질 때가 많다. 부모를 보면 아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문장에 대한 나의 해석은 ‘부모가 아이를 좋은 결과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사회가 부여하는 기준에 맞춰 노력했느냐’라기보다는 ‘부모가 얼마나 좋은 인격을 갖춘 행복한 사람이냐’를 보면 아이를 짐작할 수 있다에 가깝다. 이 시대가 그렇게 강조하는 양육 코칭이나 부모 교육이 (안 그런 것도 많지만) 단순히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한 전략즘으로 전락하는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부모에게는 엄청난 책임감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유연성 있는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고충은 사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상에 내 아이를 적응시키는’ 참으로 답이 없는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다. 마냥 행복하게만, 마냥 아이가 원하는 것만 허락하며 키울 수 없는 현실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맞이할 세상이 또 어떤 장애물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데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은 애착 이론으로 바라보면 변화된 상황에 필요한 기술과 전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다가가는 태도에 있다고 본다. 마치 엄마와 좋은 애착을 쌓은 아이가 처음 엄마와 떨어지는 엄청난 변화와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엄마와의 건강한 애착을 통해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다는 믿음 위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실수를 해도 잘 견딜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전에 언어를 습득하고, 숫자의 개념을 이해하고, 배꼽 인사를 할 줄 알고, 양보하는 법을 배우고, 친구를 때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실수를 해도, 혹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만들거나 다치는 일이 있어도 내가 그 속에서 견디고 배워가는 것을 지켜봐 주고 응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엄마라는 안전한 틀이 작은 사회가 되고 이 세상이 되면, 아이들은 어떤 변화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애착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여기서 다시 앞서 말했던 parent와 parenting의 차이를  얘기할 수밖에 없다. 애착은 how to… 로 설명되는 전략이 아니라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교환하는 시선으로 시작되어 핏덩이를 품에 안고 그의 필요를 살피고 공급하는 것이다. 아이의 필요에 응답하고 아이의 시도를 지켜봐 주고 아이의 실수를 기다려주는 모든 사랑의 행위를 통해 애착이 형성된다. 아이가 필요할 때 엄마가 그곳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대부분이다. 아이의 각각의 발달 단계에 필요한 도구나 교구를 갖추는 것보다 아이가 이웃집 아이보다 얼마나 빨리 기고 걷고 말하는 지를 체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가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된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의 어쩔 수 없이 차고 올라오는 기대에 아이가 부합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온전하고 독특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 이 선물을 있는 그대로 받고 감사하고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윤이가 아플 때 나의 불안은 극대화된다. 아이가 아프면 어느 부모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앞서간 선배의 조언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이는 스스로 잘 견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호들갑을 떨며 여기저기 필요 없는 정보와 기준을 들이대는 내 모습에서 철부지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절대 아이의 영원한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없음을, 또한 모든 병균과 시대의 장애물에서 완벽하게 구원해 줄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지금의 내 행복에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린다. 태윤이가 있어 내 행복이 풍성해졌다. 태윤이의 존재를 사랑하는 그것 안에는 그의 모난 모습, 부족한 모습, 내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모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 부족한 모습들에 어떻게 맞서느냐의 전략 적 문제는 부모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어떤 전략을 들이댄다 해도,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보다 훌륭한 전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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