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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와 딸 Apr 01. 2020

대기업의 세계, 네버랜드 (Neverland)


네버랜드 : 네버랜드는 'Never' 와 'Land' 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을 뜻한다.




대체 뭐가 유능하다는 건데?



퇴사 후 처음으로 늘어지게 낮잠을 청했다.

기지개를 펴고 문득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하얀색 벽지를 곱게 바른 반듯한 천장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손 끝이 천장에 닿았다.


이렇게 쉽게 닿는 천장이,

저 문 밖으로만 나가면 닿을 기미가 안 보였다.


출처 : Pixabay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영혼까지 갈아넣어야’ 퇴근할 수 있는 업무량과 끊임없이 일해도 도저히 내게는 멀기만 한 기회.


이미 윗자리를 꿰차고 앉은 이들은 그들 머리위 상사의 상사 말을 순순히 잘 듣는 '바보같은 인재' 들을 위한 자리일 뿐이었다.


‘진짜배기 인재’ 들은 일찍이 줄줄이 퇴사하기 시작했다. 인사팀에서는 유출을 우려해 대책을 논의했지만 당연히 속수무책이었다.




착한 언니



첫 직장에서

나의 동료였던 친한 언니가 퇴사하게 되었다.

사내 따돌림으로 우울증약을 복용하던 언니는

약기운에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면서도

늘 남들보다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끝내던 인재였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많이 따랐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업부에 있었기 때문에

차별과 따돌림을 직접적으로 방어해주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녀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움을 자신의 팀장에게 말했고,

이내 팀장은 인사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00씨, 몸도 안 좋다면서? 이참에 쉬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아프다면서, 몸은 좀 어때요?' 가 먼저 나오지 않나?

그녀는 아마 자신의 팀장이 도움의 손길을 건내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더이상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인간들에게 내 목줄을 쥐어준 채

나의 24시간 모두 노예처럼 영혼까지 갈아넣어 생산물을 넘겨주고 있었다.


언니가 퇴사하던 날, 우리는 1층 로비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는 어딘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이들로부터 자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스포트라이트


출처 : Pixabay


결국 나는 그 언니와는 다르게

옆부서 유부남의 성추행으로 사내 따돌림을 당했다.

당연히 가해자를 탓할 것 같았던 사회는

애석하게도 피해자를 탓하기 시작했다.

나는 순식간에 '쟤한테 잘못 걸리면 가정 파탄나는' 여자가 되어있었다.


'젠장,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니들이 행실만 똑바로 하고

사랑한다며 결혼한 아내와 가정에만 충실했어도

다른 여직원들 몸에 손만 안 댔어도

그딴 걱정하면서 벌벌 떨 필요 없잖아'


내 정신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으면서도

몸은 이미 온전하질 못했다.

그 이후로 시도때도 없이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월경일도 아닌데 갑자기 하혈을 하기도 했다.

출근길에 쓰러져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내 몸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00야, 이제 그만 쉬자'


나는 결국 건강악화를 이겨내지 못한 채 승진을 4달 앞두고 퇴사했다. 그 이후 이력서 퇴사사유는 언제나 '건강악화' 라고 적혀있다.


원하는 '좋은 환경' 이자 정말 뛰어나고 인간적으로도 따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상사' 를 찾기위해 몇 번이고 이직했다. 운이 따르는 한 나의 도전은 계속 되었다.


마지막엔 국내에서 이미지가 아주 좋은 대기업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너무 신나서 친구와 전화하며 폭짝폴짝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까진 몰랐다. 그 안에서 겪게 될 추악한 것들에 대해.





네버랜드 (Neverland)


네버랜드 : 네버랜드는 'Never' 와 'Land' 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을 뜻한다.


입사 4달차,

우리 부서에 경력 신입사원이 입사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팀장에게 은밀한 요청을 하고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그의 입사 한 달차,

같은 방향으로 퇴근길에 나에게 물었다.


"00씨 다른 회사출신이죠? 이직해서 온 거라고 했죠?"

"네, 맞아요. 00에서 왔어요."

"여기 이상하지 않아요?"

"왜요?"

"직무에 맞는 사람을 뽑은 것도 아니고, 저는 이 분야에 완전 문외한인데 경력으로 데려오더니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중요한 책임자리에 앉혔어요. 더군다나 저는 그 내용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교육을 해줘야 할 사수는 저에게 다음 업무 넘겨주고 빨리 손 털고 편해질 것만 궁리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이 팀의 팀장이 팀원들의 업무를 파악하고 있지도, 알고 지시하는 것도 아니던데. 저는 이제 어떻게 할 지 모르겠어요. 아무 대책이 없어요."

"...."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줬어야 할까? 나처럼 한 3달만 더 버텨봐라. 그러면 일은 할만해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도망치라고 하고싶었다. 그와 다른 파트에서 일하면서 지켜보아도 그를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사수가 일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 또한 일을 그르치면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을 뿐 사수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거지같은 시스템이다.


당신이 업무에 익숙해져있을 땐 ... 어차피 더 많은 중압감과 업무량이 숨을 조여올테니까. 열심히 하라는 말도, 버티라는 말도, 힘내라는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필요할 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해줄 수 없었다.


그 후 몇 주가 더 지났다. 이번엔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니, 전부터 아팠는데 별 일 아니겠거니 하고 바빠서 병원엘 늦게 갔다. 이번엔 목이 문제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 그것이 원인이었다.


항생제를 2달동안 처방받자 의사가 안경을 벗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절제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대로 항생제를 계속 처방하면 위벽이 모두 깎일 거예요. 지금도 속 쓰리시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봉투에 담긴 항생제가 왜 이렇게 미울까. 하늘은 눈치도 없이 예쁘게 파랗다. 가방속에 애꿎은 약봉투만 꾸겨넣었다.




일만 시키던데요



다음 날, 그는 여전히 연차를 내고 대학병원에 간다는 소식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직한 곳의 팀장 역시 팀원이 아픈데도 괜찮냐는 말 한 마디 없이 인사만 받아줄 뿐이었다. 이미 세뇌되어있을 것이다. 팀원에게 감정보다는 냉정하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그것이 이유였다. 다른 팀원들이 아파도 모른 척 하는 이유. 아마도 그런 전략으로 팀장자리까지 갔으니 자신의 선택이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팀장이 그를 데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괜찮냐며 회의실로 데려갔다. 이내 팀장과 그가 웃으며 돌아왔다. 굳이 무슨 일이냐며 묻지 않았다.


출처 : Pixabay


아침 커피를 사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그가 커피를 들고 내렸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내려가려는 찰나, 그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망설이더니 이내 말문을 연다.


MRI 를 찍으러 갔는데 뇌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이전엔 한 번도 뇌에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없었는데, 여기 와서 일 한 지 한 달 째부터 증상이 생겼단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팀장이 어떻게 하기로 했냐고.


"그러냐고 하더니 그 다음엔 일만 시키던데요."


그에게 퇴사할 것인지 여부를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이 그만두면 일은 어떻게 하냐고. 그 정도 경력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면서도, 그 역시 이미 세뇌되어있었다. '책임감' 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습관화 되어버린 것이다.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든 커피잔을 바라보는 그에게 커피보다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모습을 보며 정말 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우리의 존재는 부정당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 후에 나는 팀장에게 어디가 아픈 지,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나를 위해 사직서를 제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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