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bertee May 02. 2024

도망가자. 갔다.

삶의 여백이 너무 부족해서 4

J와 Full Time Friend가 되고나서부터 도망치는 법을 배웠다.

힘든 하루를 살아내고, 자기 전까지 보통 4시간. 이 4시간을 도망치는데 써봤다. 시작은 비행기 표와 당일 숙소만 예약하고 떠났던 2박 3일 제주도 여행이었던 거 같다.

어제는 퇴근 후 사무실 밖을 나서니 훅- 하고 추운 바람이 내 살결을 일으켰다. 드디어 가을이다. 이젠 진짜 ‘가을이야!’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 가을. 그래서 J에게 ‘차박 갈래?’라고 했다. 쌀쌀한 바람이 불고 나는 반팔 위에 엄청 큰 후드티를 입고 그러고 바다를 걷다가 바다가 창문으로 보이는 차로 들어와서 푹 자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회사부터 지하철을 타는 그 15분 동안 캠핑카 예약을 마치고, 그제야 각자 집에서 뭘 챙길지 얘기하고 1시간 반 뒤에 캠핑카 안에서 만났다. 커피랑 샌드위치를 사들고. 도망치는 날마다 매번 아늑한 차 안에서 오늘 하루를 잘 살아 냈음에 서로 칭찬하고 다독여준다. 그다음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다.

“우리가 쏘카 BM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아닐까?”

“맞아 쏘카 페르소나”

“맞아 우리 이 정도면 P(MBTI의  J/P를 말함)가 아니라 Q, R...  R 정도는 돼야 하는 거 아닐까?”


그다음엔 회사 이야기. 회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얘기하면 이렇게 해보는 게 좋을 거 같다. 등의 해결책을 주려고 한다. (두 T는 그게 자연스럽다.)

그다음엔 보통 J의 사랑 고백을 듬뿍 받는다. 내가 뭘 얼마나 잘하는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이걸 소프트스킬이라고 멋진 이름을 붙여서 또 그놈의 ‘스킬’)가 중요한 세계에 허덕이고 있다가 이 조용한 차에서 J랑 같이 내가 그냥 나여서 중요하고 가치 있고 사랑스럽다는 세계에 도착한다.


우리는 새벽 3시가 다 되어서는 동해 망상해수욕장의 캠핑장에 차를 대놓고 잠을 잘 준비를 한다.

“내일 11시 회의네”

“빨리 자자.”

“너 심장 뛰어”

“응 지금 너무 설레. (불과 몇 시간 전에 서울이었고, 회사였는데 지금 우리는 강원도이고 그냥 차 문만 열면 바다야. 그리고 난..! 지금 캠. 핑. 카에서 잔다고!) “

“초딩이세요? ㅋㅋ”


내일은 아침에 일어나서 공용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퀭한 눈으로 출근을 하겠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회의 준비를 하겠지.




하지만 무척 고요한 여행을 해요. 생각 여행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저 걷고 그저 보고 그저 내맡기고 그저 먹고 특별한 목표도 없이 시간을 쓰고 그러다가 무너가 압도적인 풍경 앞에 넋을 잃고, 놀란 나머지 그만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풍경 속에 저의 일부분을 두고 오면 가벼워지고 행복해져요. 괴테가 말한 ‘나를 잃고 세계를 얻었다!’ 같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된 거었지요. 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풍경의 한 조각이라서 오히려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눌러야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 아시죠? 

외롭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게으르지 않은 오늘을 보내고 싶고요. 나를 잃고 세계를 얻는 화요일을요.

-정혜윤, <인생의 일요일들> 



이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 내가 남겨둔 메모가 있다.

'

'내가 생각해 온 어떤 큰 목표가 있고, 그걸 이루고 나서 한 쉬는 텀 동안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왜 그렇게 크고 거창하게 생각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아님 3시간만이라도 6일 하고도 21시간을 열심히 산 나를 위해 ‘나를 잃고 세계를 얻는’ 경험을 나에게 선물해 줄 순 없을까?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빡빡하게 사니 인생을 현정아..

'


그런데 지금은 도망쳐보니 내가 도망치고 싶어 했던 나의 지난 12시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고, 결국 나는 외롭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게으르지 않은 오늘을 보내고 싶었던 거라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내일의 12시간을 살아갈 힘을 얻고 잠이 든다.

내일은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을 하루를 만들어보자, 다짐한다. 하지만 꼭 그 다짐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숙제

훌쩍 떠나보기.


그래도 막막하다면

망상해수욕장


음악

도망가자 - 선우정아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작가의 이전글 책임감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