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트맨 라이프 Mar 06. 2024

로맨틱

아주 오랜 후에야

오랜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라 나의 고딩때가 궁금하다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도 그때의 나를 곱씹고 있었다.


나는 중학생 때 새벽에 시험공부를 하다 오리온자리를 보게 된 날 이후부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읽고 우주가 점점 팽창하면서 각 은하계 사이가 멀어진다는 이야기를 너무 신기하게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문학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에는 서울시내 고등학교 중 단 세 군데에만 있던 천문학 서클이 있었다. 나는 당연하게 그 서클 가입을 희망했지만 남녀공학 고등학교 여학생 중 나만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는지, 지도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 여자가 너 혼자라 안 되겠다고 하는 말까지 들었다. 내가 너무 슬퍼하니 선생님은 다른 여학생들을 데려오라고 하시면서, 데려올 때 서클의 기준인 성적 제출을 강조하셨다. (천문학을 해야 하므로, 수학과 물리를 잘해야 한다면서...)


여차저차 나는 다른 두 명의 여학생을 섭외하여 결국 천문학 서클을 시작했다. 내 고등학생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십춘기의 정점을 지나가던 시기였다. 한 달에 1회는 각자 읽은 책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논문 발표와 거의 유사하게 정리해서 친구들에게 발표도 했고, 그게 꼭 천문학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우주의 주기에 맞춰 서클에 구비된 장비들로 접사사진도 밤새 찍고, 학교 축제 때는 찍은 사진들과 그 시기에 가장 잘 보이는 달과 별들을 굴절 망원경, 반사 망원경으로 아이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맞게 서로를 좋아하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는 당구를 고딩 주제에 이미 300 치던 군인의 아들이었던 키 크고 못생긴 아이였다. 아버지에게 반항한다고 가출을 해서 유기정학을 당해 서클에서 제명당했다가 고3 때 선생님의 배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목성 대접근 때 모여서 위성까지 찍어보겠다고 밤새 접사사진을 찍는다고 추운 서클실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가 떨어뜨린 목도리를 주워서 간직하고 있다 나중에 예쁘게 접어 나에게 전해주는 그 아이를 보며 "혹시 너도 날 좋아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아이. 발굴의 운동신경으로 수석으로 체대를 진학하고 받은 장학금으로 다른 일을 한다고 했던 그 아이.

내 눈엔 그 아이만 보였었다. 그 아이의 행동, 입었던 옷들, 말, 그리고 그 아이 친구들과 했던 미팅까지 잊을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의 고딩 시절은 그 아이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서클 아이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던 키 크고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던 아이. 고1 겨울 방학 때 우리는 서클 문집을 만들었는데, 서클 편집부장이었던 그 애와 서클 부반장이면서 문집 만들기에는 언제나 진심이었던 내가 겨울 내내 선배들, 동기들 글과 선생님들 글을 모아 하나하나 손으로 글을 써서 책 한 권을 만드느라 붙어 다녔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나에게 자기 동생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줬다. 이걸 왜 주냐고 물으니 그냥 준다고 했던가, 대답을 안 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여하튼, 그 아이의 사진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대학 들어간 뒤에 한 번 더 따로 봤다고 이야기했다. 그 애가 자기 학교에 오라고 해서 가서 밥 얻어먹고 온 거. 그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깨달았다. 그 친구가 날 좋아했던 것이란 걸... 단 한 번도 그렇게 잘난 친구가 "나 같은 것"을 좋아하리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건, 그냥 누군가의 얼굴이 있는 사진을 버리거나 할 수가 없어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로맨틱한 그 친구의 은밀한 고백을 20여 년이 훌쩍 지나 나는 이제야 겨우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언젠가 내가 그 로맨틱한 고백을 깨달을 거라고 사진을 줄 때부터 알고 있었을까? 너무 늦게 깨달았나 보다. 어쩜 그 아인 내가 바로 알아차리고 어떤 액션을 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이제야 겨우 알았다. 로맨틱하고 은밀한 그 아이의 마음을.


갑자기 내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설렌다.

로맨틱하다.  


























작가의 이전글 차갑고 따뜻한 모순형용-하노이_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