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후에야
오랜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라 나의 고딩때가 궁금하다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도 그때의 나를 곱씹고 있었다.
나는 중학생 때 새벽에 시험공부를 하다 오리온자리를 보게 된 날 이후부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읽고 우주가 점점 팽창하면서 각 은하계 사이가 멀어진다는 이야기를 너무 신기하게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문학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에는 서울시내 고등학교 중 단 세 군데에만 있던 천문학 서클이 있었다. 나는 당연하게 그 서클 가입을 희망했지만 남녀공학 고등학교 여학생 중 나만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는지, 지도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 여자가 너 혼자라 안 되겠다고 하는 말까지 들었다. 내가 너무 슬퍼하니 선생님은 다른 여학생들을 데려오라고 하시면서, 데려올 때 서클의 기준인 성적 제출을 강조하셨다. (천문학을 해야 하므로, 수학과 물리를 잘해야 한다면서...)
여차저차 나는 다른 두 명의 여학생을 섭외하여 결국 천문학 서클을 시작했다. 내 고등학생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십춘기의 정점을 지나가던 시기였다. 한 달에 1회는 각자 읽은 책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논문 발표와 거의 유사하게 정리해서 친구들에게 발표도 했고, 그게 꼭 천문학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우주의 주기에 맞춰 서클에 구비된 장비들로 접사사진도 밤새 찍고, 학교 축제 때는 찍은 사진들과 그 시기에 가장 잘 보이는 달과 별들을 굴절 망원경, 반사 망원경으로 아이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맞게 서로를 좋아하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는 당구를 고딩 주제에 이미 300 치던 군인의 아들이었던 키 크고 못생긴 아이였다. 아버지에게 반항한다고 가출을 해서 유기정학을 당해 서클에서 제명당했다가 고3 때 선생님의 배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목성 대접근 때 모여서 위성까지 찍어보겠다고 밤새 접사사진을 찍는다고 추운 서클실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가 떨어뜨린 목도리를 주워서 간직하고 있다 나중에 예쁘게 접어 나에게 전해주는 그 아이를 보며 "혹시 너도 날 좋아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아이. 발굴의 운동신경으로 수석으로 체대를 진학하고 받은 장학금으로 다른 일을 한다고 했던 그 아이.
내 눈엔 그 아이만 보였었다. 그 아이의 행동, 입었던 옷들, 말, 그리고 그 아이 친구들과 했던 미팅까지 잊을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의 고딩 시절은 그 아이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서클 아이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던 키 크고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던 아이. 고1 겨울 방학 때 우리는 서클 문집을 만들었는데, 서클 편집부장이었던 그 애와 서클 부반장이면서 문집 만들기에는 언제나 진심이었던 내가 겨울 내내 선배들, 동기들 글과 선생님들 글을 모아 하나하나 손으로 글을 써서 책 한 권을 만드느라 붙어 다녔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나에게 자기 동생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줬다. 이걸 왜 주냐고 물으니 그냥 준다고 했던가, 대답을 안 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여하튼, 그 아이의 사진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대학 들어간 뒤에 한 번 더 따로 봤다고 이야기했다. 그 애가 자기 학교에 오라고 해서 가서 밥 얻어먹고 온 거. 그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깨달았다. 그 친구가 날 좋아했던 것이란 걸... 단 한 번도 그렇게 잘난 친구가 "나 같은 것"을 좋아하리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건, 그냥 누군가의 얼굴이 있는 사진을 버리거나 할 수가 없어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로맨틱한 그 친구의 은밀한 고백을 20여 년이 훌쩍 지나 나는 이제야 겨우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언젠가 내가 그 로맨틱한 고백을 깨달을 거라고 사진을 줄 때부터 알고 있었을까? 너무 늦게 깨달았나 보다. 어쩜 그 아인 내가 바로 알아차리고 어떤 액션을 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이제야 겨우 알았다. 로맨틱하고 은밀한 그 아이의 마음을.
갑자기 내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설렌다.
로맨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