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상과 김홍남 씨 그리고...
나도 여느 요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 유튜브 쇼츠를 많이 본다. 쇼츠에서 신선한 충격은 코미디언 김경욱의 다나카상이라는 부캐였다. 본캐와 부캐라는 단어는 게임을 할 때 많이 쓰던 단어이고, 그저 우리들에게 부캐의 용도는 본캐로 입장하면 너무 많은 견제를 받을 때, 슬슬 게임을 하고 싶을 때, 부캐로 들어가 그 판을 뒤집어엎어버리고 속으로 키득 거리면서 나오는 쓸모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 나의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어버리는 부캐 캐릭터로 히트를 친 다나카상은 일본말도 정말 잘하고 (? 일본인이니 잘하는 게 당연한 건가??) 밉지 않은데 어딘지 우리의 골을 때리는 시츄에이셔널 스토리텔링을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예전 웃찾사 때도 나몰라 패밀리는 좋아하는 코너였는데, 역시 김경욱이다 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나의 골을 때리는 53세 김홍남 씨. 여돌들의 노래를 뽕삘 충만하게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김홍남 씨는 모든 여돌들의 노래를 다 똑같은 4분의 4박자로 뽕짝뽕짝 불러 젖힌다. 아아아 웃겨...
김경욱의 부캐들을 보며, 나는 부캐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의 첫 부캐는 돌이켜보면 중1 때의 "세정"이었던 것 같다. 같은 반 친구 중에 한 아이가 나에게 니 이름이 좋냐고 물었다. 별로라고, 내 이름의 출처는 언니였고, 둘째이고 딸이었던 내 이름을 언니 이름에서 한 글자만 바꿔서 등록한 스토리를 엄마에게 듣고 내 이름을 한때 증오했었다고 하니, 이 친구가 그럼 서로 이름을 새로 지어주자고 한다. 그 친구는 나에게 "세정"이라고 지어줬고 나는 그 친구를 "민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주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 세계에서 우리는 세정이라는 아이와 민지라는 아이인 듯 생각하고 살았다. 이름만 바꾼 게 부캐는 아니겠지만, 현실의 나와 조금 다른 "나"를 연기하던 이름이었으니 나의 첫 부캐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대학 때 모두가 미친 듯이 하던 "세이클럽"에서의 챗질 하던 나의 다양한 부캐. 주로 영퀴[영화퀴즈] 방이나, 재즈 듣는 방에서 다수 중 한 명으로 활동했지만, 간혹 몇 명이 모여 수다를 떠는 방이나 1대 1 채팅 요청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나는 새로운 인물로 설정을 해서 "현실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나를 연기했다. 아바타가 처음 세이클럽에 등장했을 땐, 성별을 "비공개"로 해두면 이불 뒤집어쓴 아바타를 주는데, 그 비공개 아바타는 나의 최애 아바타였다. 성별마저 바꾸고 나는 "내가 아닌" 혹은 "내가 없는" 대화를 했는데 참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타인을 관찰하는 일이 취미인 나에게 세이클럽의 부캐 채팅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다양한 직업과 성격의 사람들의 속마음 엿보기에 너무 좋은 장이었다.
세 번째 부캐는 카트라이더 부캐이다. 국민학생 되기 전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공부할 때 내가 목표한 분량을 다 하면 나에게 주는 선물로 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다. 게임은 두 판을 넘기지 않게 했지만 한두 가지 목표를 정하면 그 게임은 막판까지 깨야만 손을 놨다. 그런 게임이 카트라이더이다. 스피드 개인전이나 팀전은 하지 않았고, 아이템 팀전만 했는데 아이템을 사용하는 전략과 4명의 팀원들의 팀워크를 살피면서 게임을 하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아이디는 딱 두 개였는데 본캐든 부캐든 나이, 성별, 성격 모두 현실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튜닝해서 게임을 했다. 한창 전성기 때는 내 닉넴은 아주 유명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다른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그 공간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
나에게 부캐가 필요했던 이유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건실하게 살아왔다. 내가 모범생이 아닌 이유는 나 자신의 도덕성과 룰에 따르지만 사회가 정해준 룰을 지키면서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개인주의자인 내 룰에 반하는 행동 이어서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일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그건 현실의 일인 것이고, 부캐로 가장하고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내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설정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나의 정신적 유희였는데, 다나카상을 연기하는 김경욱도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요즘의 나는 부캐(척하는 나)를 끊고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깊은 침잠의 시기를 겪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나"로써 남은 인생을 꾸려가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데 부캐로 나를 소비할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레이존으로 남아 있는 나 자신의 부분들을 색칠하고, 원하는 것들에 집중하여 불필요한 것들을 쳐내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므로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부캐는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닛몰캐시나 최준, 랄랄 같은 부캐인 듯 부캐 아닌 부캐 같은 상황극들에 함몰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내가 아닌 나"를 만들고 싶거나 본질은 관심이 없어지고 가볍고 톡톡 쏘는 것들로만 그저 인생을 채울 만큼 가벼워진 세상살이를 유튜브나 틱톡 같은 공간들이 더 부추긴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신념대로, 더욱 나다운 나로 부캐 없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지만 그들이 만든 부캐는 즐겁게 소비하겠다. 어느 때보다 나는 진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