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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May 11. 2024

화양연화 -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간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2주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다.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성경공부를 위해 만든 사랑방 모임에 참석한다. 지난주, 오랜만에 6명 전원이 화면에 등장했다.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 대부분 나보다 연배가 높아 깜빡하고 모임시간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 10분 정도 목사님이 영상으로 준비한 사랑방 모임을 위한 말씀을 들은 후, 주어진 질문에 대해 서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 질문 중의 하나가 “살면서 말과 행동 및 믿음과 사랑으로 내 삶의 본이 되었던 분을 떠올리고 그를 통해 본받게 된 것을 나누세요.”였다.  


모두 묵묵부답이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 순간, 어느 한 분이 장로님을 소환했다. 우리 사랑방에서 닮고 싶은 분이라고 했고 모두 한마음으로 동의했다. 지금 이 모임의 리더역할을 하고 계신 장로님이다. 그분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약 12년 전에 은퇴한 분이다. 나의 아파트 바로 앞 동에서 살면서 지금까지 25년 이상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자연스레 멋있게 늙어 가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분이다. 이 말을 듣고 본인은 '아니라고~' 조금은 멋쩍어하는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이 한 분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분이 언급한 분은 올해로 104세로 최고령 철학자인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이다. 이미 국내에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철학자이다. 최근에 <김형석, 100년의 지혜>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나 역시 예전에 그분이 쓴 책을 읽고 ‘저렇게 멋있게 나이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장 기억이 나는 글귀가 있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제일 좋은 나이가 65세에서 75세였습니다.”


내가 바로 그 나이에 진입하고 있지 않은가?

김형석 명예교수가 생의 황금기라고 얘기한 65세에 접어들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는 홀가분하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젊은 시절에 방황하면서 보낸 시간이 아까웠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하면서 후회하기보다는 ‘은퇴 후에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집중하고 싶다.


“가장 행복한 인생은 늙지 않고 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늙지 않고 오래 일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 가운에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50세 후반을 지나면서 학교와 사회활동을 하면서 너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며 나를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냥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마침 2018년, 대학으로부터 연구년을 받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 태국 치앙마이, 캐나다 로키산맥 등 그동안 바빠서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중에 은퇴하면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행하고 마음껏 쉬고 싶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주에 한 달, 치앙마이에 한 달, 그리고 로키산맥을 여행하면서 쉰다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느긋하게 쉬는 것은 필요하다.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여행하고 쉬기만 한다면 그 활력이 퇴색되어 버린다.


여행이 끝날 즈음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사람은 일을 해야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라고 한 김형석 명예교수의 말씀을 몸으로 느꼈다.


‘은퇴한 후에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그럭저럭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최선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 열심히 일했다. 자식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고 각자 자기 갈 길을 독립적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었다고 자부한다. 아내 역시 가족을 위해 희생을 많이 했다. 자기 경력을 쌓지 않고 아이들 양육과 교육이 본인의 ‘백만 불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노력했다. 그만하면 부모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 이제 자식들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나아갈 것이다.


사랑해 - 2024. 3. 31


자식들은 결국 둥지를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은 부부밖에 없다. 그동안 아내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사랑해~'라는 표현에 인색했다. 이제는 자주 하련다. 아내는 아직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괜찮다. 본인이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갖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나다.    


올해, 28년을 지냈던 교단을 떠난다.

미련은 없다.


남들보다 오래 현역에서 일을 한 셈이니 아쉬움도 없다. 다만 희망이 있다면 계속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나 봉사 활동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고 싶다. 그렇다고 일중독자가 되기는 싫다. 돈을 벌기보다는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 일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개의치 않는다.


은퇴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생각나는 것이 ISO 국제표준화 활동이다. 이 활동은 나이에 관계없이 영어와 기술 관련 전문성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2027년까지 ISO Technical Committee 51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을 예정이니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분야이다. 김형석 명예교수의 아랫말에 용기를 백배 얻는다.


“나 자신이 살아보니까 90세까지는 늙는 게 아니에요. 90세까지는 누구나 똑같이 일할 수 있어요.”   

“경제는 중산층에 머물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이 행복하여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더 많이 누리도록 되어있다. “


지금은 백세 시대이다.

김형석 명예교수도 얘기했지만 이제는 인생이 3막까지 열린다. 30세까지 배우고 60세까지는 직장에서 사회인으로 일하는 기간이다. 예전에는 회갑연을 하고 나면 삶을 마무리하는 시기로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 회갑연을 끝내고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은 회갑연조차 하지 않는다. 은퇴 후 90세까지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나 자신이 인생 3막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평생을 즐겨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다.

산에 오르고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무릎이 좋지 않아 관둘 수밖에 없었다. 몸의 변화에 순순히 적응해야지 어떡하겠는가? 지금은 육체적으로는 수영이 가장 나에게 맞는 운동이다. 약한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심폐기능을 강화하고 온몸의 근육을 유지시켜 주기에 아주 좋다. 더구나 수영을 하고 나면 머리가 더욱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혈액 순환이 뇌까지 연결되면서 정신이 맑아지기 때문일 게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를 때,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수영도 마지막 피치를 올릴 때 힘들지만 몰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로지 나의 호흡만 느낀다. 마치 명상을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가끔 육체적으로 이곳저곳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통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라 그냥 ‘이 정도의 고통은 감사합니다.’라고 지나친다. 심하면 진통소염제를 먹으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어 감사하다. 사실 감사할 일이 즐비하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모든 게 감사하다. 백내장이 와서 수술을 해야 하지만 수술하고 나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정도니 그 또한 감사하다.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 평안을 가져주는 그런 취미를 갖고 싶다. 최근에 배운 수채 캘리그래피를 계속 배우고 익히고 싶다. 은퇴 후에는 더욱 집중적으로 배우련다. 일단 시간이 잘 간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순간에는 모든 걸 잊어버린다. 그 결과물을  친구나 지인에게 선물할 수 있어 더욱 좋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글귀를 쓰고 마음에 담아서 주면 받는 사람도 기뻐한다. 상대가 기뻐하면 나 또한 기쁨이 배가 된다.


수국 - 2024. 4. 15


또한 글을 쓰면서 중간에 캘리그래피를 넣어주면 글의 의미가 생생해지기도 한다. 위의 수국은 최근에 그린 그림이다. 초여름에 활짝 피는 아름다운 수국이다.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여러 개가 모여서 탐스러운 꽃다발을 이루어 풍성하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알칼리와 산성 토양에 따라 색상이 바뀌는 수국도 있어 신기하기도 하다. 나 자신이 수국처럼 풍성한 마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이 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다발처럼 풍요로운 마음이 되길 바란다.


수국을 보면서 삶을 돌아본다. 더 이상 젊은 시절의 그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도 없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어깨 위에 놓인 짐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다. 경력을 쌓아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망도 없다. 꽃은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무르익으면 자연에 유익을 준다. 나 역시 앞으로 계속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지혜를 구하고 어제보다는 더 인격이 무르익고 성숙해진 내일의 내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는 사람이고 싶을 따름이다.


평생을 살면서 지금이 가장 평온하고 빛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일도 그러하길 희망한다. 한때 빛났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림의 수국처럼

'화양연화'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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