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재균 Sep 17. 2024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

추석날 아침이다.

책상에 앉아 있으니 주위가 고요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에 이 시간에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생각한다.


아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일게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무모했던 시기도 있었고 한때는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삶은 다가오지 않고 순간의 선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인생에 대한 계획도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없다. 사랑도 그러했다. 모두가 내가 서투르고 감정에 휩쓸려서 성급하게 결정을 내려서 그런 결과가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이 삶이 내가 처음으로 겪고 있으니 어떡하겠는가? 모든 게 서투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가 떠오른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연애시절부터 서로가 애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각자의 삶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서로를 진실하게 대하지 못하고 어설프고 서툴렀다. 결국 결혼에 이르기는 하지만 첫날밤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6시간 만에 에드워드의 충동적인 감정과 갈등을 참지 못한 채 체실 비치에서 커플이 헤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흘러간다.


단지 영화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에서 후회할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네 인생도 순간적인 갈등과 충동으로 인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나의 삶도 1960대 영국에서 살았던 영화의 주인공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감정표현이 서툴고 판단을 서둘러서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인생은 내 뜻대로 결코 흘러가지 않는다. 나 역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 군 병원 입원실에서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겪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발동했다. 그 절박했던 마음이 동기가 되어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삶은 흘러갔고 지금에 이르러 알게 되었다. 그 당신에는 몰랐다. 그 시간이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에서 두 연인의 서투른 사랑이야기처럼 한참을 지나고 나야 그 시간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탄생과 죽음의 순간이 아닐까? 이 두 사건 모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추석 날 아침에 한 친구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날따라 봄비가 세차게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내 집과 가까이 있는 친구가 나를 차에 태우고 추모공원으로 갔다. 고인의 유골함을 안치하고 마지막으로 영결을 고하는 시간이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추모공원에 도착하니 비가 더 세차게 온다.


고인은 고교동창이다.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친구들을 끄는 힘이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그 친구 자리로 모여들면 그때부터 친구가 ‘썰’을 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다. 친구는 어디서 구했는지 당시에 야한 잡지로 알려진 펜트하우스를 갖고 오면 수업시간에 몰래 돌려보는 재미를 만끽했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주위에 사람을 모이게 하는 에너지가 있는 친구였다.


졸업 후, 소식이 뜸하다가 서울에서 동창회를 하면 아주 가끔 얼굴을 비추곤 했다. 그런 후, 사법고사를 늦은 나이에 합격하여 대구로 내려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잊혔다. 어느 날 대구의 한 친구가 ‘산을 좋아하는 모임’이 있어 밴드에 초청할 테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 밴드에서 그 변호사 친구가 대구 근처의 팔공산을 누비면서 ‘팔공도인’이란 별명답게 왕성하게 산악활동을 하고 있었다. 올해 봄, 이 친구가 팔공산 산행 중에 실종이 되었다는 소식이 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추락사를 했다는 안타까운 비보를 들었다.  

 

나와는 오랜 인연은 없었지만 고교시절에 왕성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나의 기억에 오래 남은 친구였다. 친구의 유골함 안치식을 비가 내려서 천막 안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명복을 빌면서 나의 죽음도 떠올랐다. 이 육체의 죽음으로 나의 삶도 끝나는 걸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과연 내 의지대로 가족들이 지켜보는데서 임종을 맞이할 수는 있을까? 주위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죽은 후에 과연 영혼은 어디로 갈까? 내가 믿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천국은 어떤 모양새일까?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의 노래가 떠올랐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노래다.

원래 이 노래의 작사가는 미상으로 ‘A Thousand Winds'라는 미국 원주민 사이에서 구전되어 온 시를 일본 작곡가 아라이 만이 작곡하여 2003년에 싱글앨범 “천의 바람이 되어”로 발매되었다. 2009년 한국의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한국어로 번안하여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곡으로 한국에서 발표되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내 마음속에 있는 영혼에 대한 무언가를 대신 불러주고 있음을 느낀다.


죽음 이후에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그런데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 다만 우리 인류의 영혼이 각자가 자신의 육체를 초월하여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는다. 우리가 처음에 그곳으로부터 왔던 그 포인터이다. 그곳이 프랑스 샤르뎅 신부가 얘기한 ‘오메가 포인트’가 아닐까? 우리는 이 생을 잘 마치고 우주 속 영혼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주창한 “생명활동은 전진하면서 성장하고 진전됨에 따라 창조해 가는 것”이라는 죽음마저도 ‘창조적 진화’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마치 학교에서 사물의 이치를 배우는 것처럼 이 세상에 와서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부단히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과정의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세상은 ‘인생 학교’인 것이다. 인생 학교를 졸업하는 날이 죽음의 시간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창조와 진화가 그물망처럼 서로 얽혀서 관련이 있듯이 삶과 죽음도 함께 연결되어 있다. 한동안 ‘Well-Being'이 유행이었다가 최근에는 'Well-Dying'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삶과 죽음이 동떨어져 있지 않듯이 ’ 웰빙과 웰다잉‘ 역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잘 살아가야 잘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삶의 과정에서 던지는 핵심 질문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삶의 지향점이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주위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죽음을 심각하게 한 번쯤 생각한다. 그리곤 며칠 지나면 금방 또 잊어버린다. 마치 죽음은 아직은 나와 멀다는 착각 속에서 다시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다 시한부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야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렵다.


지금 만약 내 삶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앞으로 남은 삶의 모습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만일 나의 생명이 6개월 정도 남았다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들까? 지금까지 추구했던 모든 세상적인 고민과 욕망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일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명예와 권력이 있어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 가끔 일부러 이러한 생각을 한다. 그러면 세속적인 욕망들이 실체가 없는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내가 세상에서 추구하는 많은 것들이 헛된 것이고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찾게 된다. 이 세상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깊이 있게 생각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삶 그 이후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캘리그래프, 2024년 9월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준비를 많이 한다. 그곳 목적지 국가의 돈으로 미리 환전하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구경할 것인지 준비를 철저히 하고 출발한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준비하지 않는다. 세상에서의 무한경쟁과 명예욕, 쾌락에 젖어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다. 가능한 외면 한다. 죽음을 멀리한다. 마치 내 일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짐짓 모른척한다.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할 정도로 그 정보가 깜깜이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이었던 고 이병철 회장이 죽기 전에 어느 신부에게 신의 존재와 죽음에 대한 많은 질문을 남겼을까? 차동엽 신부가 쓴 <잊혀진 질문>에 고인의 질문이 있다.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과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과학이 발전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 그리고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7.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이어서 총 24개의 질문이 들어있다.


결국 그분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신부로부터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한 인간이 죽음을 직면하면서 삶의 자리에서 던진 절박한 질문들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곤 하다가 세상일에 빠져서 잊고 산다. 삶에서 고통과 역경이 닥칠 때가 오면 겨우 이런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나 역시 이런 질문에 대해 내 나름의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 인간이 이곳 물질계에 살고 있지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이 다른 양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오면 육체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마치 고치를 벗어버리고 창공을 자유롭게 나르는 나비처럼 말이다. 육신은 단지 죽음이라는 변화를 겪을 때까지 나비가 되기 전의 고치처럼 일시적으로 머무는 집이 아닐까.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내 영혼은 고치를 벗어난 나비처럼 자유롭게 훨훨 빛의 세계로 날아가는 꿈을 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