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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Oct 14. 2024

낯섦과 익숙함 그 시간 속으로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아내가 침대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남편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남편이 “사랑해…”라고 희미하게 말한다.

아내는 “같이 가고 싶어.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 너무 늦게 알았어.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당신 내 마음 알지? 알지 응?”

남편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영상은 끝이 난다.

“알아…”


나는 왜 이 시간에 그 낯선 죽음을 생각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보는 것은 살면서 가장 외면하고 싶은 낯설고 슬프고 두려운 시간이다. 그 애도의 시간에도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살아 있기 때문에 ‘나도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미처 못한다. ‘죽음은 아직 저 멀리 있어’라는 착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죽음은 아직 남의 일이고 내 앞에 닥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가끔 친구들의 부음을 느닷없이 받으면서 장례식에 조문을 가면 죽음이 가까이 있는 듯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나는 아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애도하지만 막상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죽음 얘기를 꺼내면 ‘벌써 재수 없게 왜 죽는다는 얘기를 꺼내?’라는 핀잔을 듣는다. 나이가 들어도 지금까지 살았듯이 그렇게 평생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살아간다. 노년이 되면서 죽음이 곁에 더 가까이 올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을 더 피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죽음에 무슨 준비가 필요하나?’라고 하거나 ‘구구팔팔이삼사’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일 뿐이다. 그럴수록 죽음을 똑바로 보면서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준비하면서 살아갈 때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소개한 영상에서 남편은 시한부 말기암 진단을 받고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장례식을 치를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예약하고 장례식에 초청할 명단까지 꼼꼼하게 챙기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영화감독이자 그의 막내딸은 아버지가 말기 위암 판정을 받는 순간부터 병투병을 하고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면서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았다. 막내딸이 영상에 담아 <엔딩노트>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남편인 스나다 도모아키 씨의 삶은 영상처럼 집에서 아주 편안하게 마감되었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맺혔다. 나는 영상과는 전혀 다르게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작별 인사도 못하는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려고 한다.


<엔딩노트>의 죽음을 보면서 다시 나의 삶을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스나다 씨처럼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언젠가는 담담하게 가족을 앞에 두고 ‘사랑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능한 일일까? 운명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준비는 하고 싶다.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지금 이 일상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프, 2024년 3월


아침에 내 혼자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사건이라는 사실은 요양병원이나 중환자실에 가면 느낄 수 있다. 나 스스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 내 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뇌에서 신경세포가 화학반응과 전기자극을 통해 입술과 혀 그리고 식도와 기도의 근육을 움직이도록 명령하고 그 근육들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반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파킨슨 환자가 음식과 물을 삼킬 때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보면 이런 기적과도 같은 생명현상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에너지를 만들어 걷고 생각하고, 그 잔여물은 자연스레 소변과 대변으로 배설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건이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 기적이 매일 매 순간, 이 시간에도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이 기적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숨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다.


나 스스로 내 삶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탄생부터 마지막 시간인 죽음의 순간까지 <나의 엔딩노트>를 영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낯선 곳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 낯선 죽음을 넘어 또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발을 들여보는 상상을 한다. 죽음은 과연 나의 존재에 대한 소멸일까? 아니면 물질계에 살고 있는 동안 존재한 내가 또 다른 빛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까?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영혼은 파동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잘 모르겠다.


삶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낯선 지구별에 던져졌지만 나는 나의 삶을 개척하면서 생은 처음이라 서툴지만 그래도 의미 있게 삶을 꾸려 나가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삶의 순간에는 그나마 준비를 하면서 낯선 죽음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다.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낯선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도 할 수 있겠다. 내 삶에서 질병을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불편했던 시간이 있었다. 낯이 설었지만 차츰 그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서 편안했고 다시 무료한 시간이 찾아오곤 했다. 그 낯섦과 익숙함이 반복되었던 일상을 찾아 삶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쓰면서 내 삶의 궤적을 쫓아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나의 엔딩노트>를 만들고 싶다.


그 낯선 죽음의 시간도 미리 숙고한다면 두려움은 줄어들고 조금은 익숙해지지 않을까? 죽음은 신앙적으로는 다시 나의 삶의 근원이 되었던 그 존재의 본향으로 돌아가서 절대 존재와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 믿는다. 죽음은 비록 우리 인간에게 낯설기는 하지만 결국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의미를 찾는 과정 가운데 삶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시간이다. 미리 갈 수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많이 낯설게 느껴지고 두려워서 생각을 피해 간다. 나의 삶의 시간 속에 낯설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계절의 환절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그 시간을 왠지 불편했다. 살아가면서 처음 경험했던 낯선 순간과 그에 저항하는 힘을 쏟고 다시 익숙함으로 인한 편안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그 뫼비우스 띠 같은 순환고리 속에 바로 삶이 있다.


사람에게도 사계절이 있다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이 쓴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 나와있다. 개인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성인 발달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성찰한 책이 있다. 인생에 사계절이 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름에서 가을 문턱으로 들어서는 환절기가 오면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면서 몸을 둘러싼 주위 환경이 변한다. 몸은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방어하면서 힘들게 환절기를 지나간다. 삶에도 계절의 환절기와 같은 시기가 있지 않을까?


60~65세는 장년후기 전환기로서 그 이후에는 노년기로 접어든다고 했다. 나는 계절로 치면 가을 수확을 하고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노년기의 겨울을 채비하는 환절기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계절의 환절기에 접어들었다. 환절기를 맞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불편하여 가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국 저항하면서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잊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위대한 자연과 우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생로병사라는 유전자에 심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삶의 마지막에 ‘그래도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즐겁게 놀다가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롭게 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하고 혼자 묵상하는 시간을 상상한다. 레빈슨이 주장한 장년 후기의 환절기를 맞이하는 순간을 이 가을에 돌이켜 본다.


처음 환갑을 맞으면서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환갑이라니~?'라는 생각과 함께 생애 환갑은 처음이라 무척이나 낯설었다. 마치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낯선 나라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모든 첫 경험은 낯섦과 함께 신선한 설렘을 가져준다. 처음 대학 강단에 선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회사에서 매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보채면서 쫓기듯 살아왔다. 회사 내에서는 서로 웃으면서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다. 출장과 야근이 반복되던 찌든 생활을 하던 차에 대학에 들어오니 이곳은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낯설었다. 첫 강의 시간에 별로 웃기지도 않는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웃는다. ‘이건 뭐지..?’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학생들은 옆 자리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오랜만에 보는 그 풍경이 낯설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첫 순간의 경험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내가 이상한 나라에서 살았었구나.


글쓰기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처음에는 얼마나 낯설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개인적인 삶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시킨다는 게 참으로 어색했다. 혹시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라는 악플이라도 달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글을 써 내려가고 익숙해지면서 글쓰기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설렜던 시간들도 매일 반복되면서 일상이 되는 순간 다시 진부함으로 바뀐다. 음악, 회화, 소설, 시, 영화 등의 예술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이 순간이다. 일상의 무료한 현실을 낯설게 보게 만들어 삶과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 삶의 진부함을 깨뜨리면서 신선한 설렘을 선물로 준다.


인생의 궤적에도 낯섦과 설렘의 시간을 지나고 일상의 익숙함이 진부함으로 무한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삶이든 다르지 않다. 내가 지나온 시대는 그야말로 급변하는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왔다. 가난과 부유함의 부침을 몸이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의 낯섦과 익숙함의 시간 경험을 함께 나누어 독자들도 자신만의  <나의 엔딩노트>를 만들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눈이 부셨고 그렇지만 낯설었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이 글을 쓰면서 삶을 다시 돌아본다.


캘리그패프,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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