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의 딜레마와 미학
8월 중순. 많은 사람들의 여행이 막을 내려가고, 9월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이번 여름 여행의 시간들이 벌써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시점에, 다시 한번 여행을 기억하며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다. 9월이 오기 전에 미뤄뒀던 여행사진 정리를 하며 그 시간들을 되새기다 보니, 새삼 이 사진들의 기록이 다행스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여행 중에는 이따금씩 사진 찍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몇 번쯤은 여행사진의 딜레마에 빠져보았을 것이다. 여행의 순간들은 특별하기에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과, 사진에 대한 집착 따위는 던져 버리고 온전히 그 순간만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사진쟁이인 필자는 매번 그런 딜레마에 빠졌고 항상 고민했다. ‘여행지에서 정말로 여행을 만끽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카메라를 들고 있지만 자유로운 여행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에 대해.
순간과 기록 사이에서 갈등할 때, 사실 정답은 없다. ‘인생 샷’을 찍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지만 동시에 여행은 ‘인생 샷’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이 소중한 지금을 잊어버리게 될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누리는 자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마음껏 여행사진을 찍는 것도 자유이고, 사진을 잊고 그저 내 눈에 담으며 순간을 만끽하는 것도 자유이다. 여행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도 자유이고, 이어폰을 빼고 현지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자유이다. 좋아하는 한 곳에 가만히 머무는 것도 자유이고, 낯선 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하는 것도 자유이다. 이 중에서 오늘은 어떤 자유를 택할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면 된다. 그리고 양쪽의 자유 사이를 교차하며, 한쪽에 치중되지 않도록 적절한 절제가 필요하다. 여행 중에도 ‘중용의 미덕’이 중요하다고나 할까. 사진쟁이인 필자는 그중에서도 여행사진의 중용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여행 중 사진 중독을 절제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필름 카메라를 이용하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과 필름 사진의 차이는, 물론 색감이나 노이즈, 느껴지는 감성의 차이도 크지만 이 글에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지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필름 카메라는 여행자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 디지털카메라와 필름 카메라에서 좋은 사진을 얻는 방법은 각각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좋은 디지털 사진을 얻는 방법은 많이 찍는 것이다. 저장 공간만 넉넉하다면 여러 가지 구도를 시도해본 후 그중 가장 좋은 구도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다 보면 그중 빛과 구성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명장면이 하나쯤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필름 사진을 얻으려면 좀 더 낭만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것은 ‘회심의 한 컷’을 얻기 위한 신중함이다. 필름의 저장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24컷 또는 36컷), 여러 컷을 남발하기에는 필름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셔터를 한 번 누르는 일은 노출과 구도를 신중하게 계산하는 고도의 작업이 된다. 게다가 화면으로 결과물을 바로 확인해볼 수 없으니, 당장 믿을 것은 사진가의 성실한 태도밖에는 없는 것이다.
필름은 물질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에 어떤 상을 새겨 넣는다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것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일이다. 때때로 필름은 사진가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로 가 버리기 때문에(의도하지 않은 빛의 노출을 비롯한 사고들), 어느 정도 마음을 비워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행이 끝난 후 필름을 현상했을 때 내가 예상했던 결과물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예상과 다른 결과를 안겨준다는 것은 필름 사진의 매력 중 하나다. ‘본래 사진 이미지라는 것이 이렇게 통제 불가능하고, 얻기 어려운 것이었구나’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넘쳐나는 기록들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 어려울까, 아니면 처음부터 ‘회심의 한 컷’들만을 신중하게 남기는 것이 어려울까? 여행이 끝난 후에는 후자가 오히려 편하다. 남발된 사진 파일들 중 베스트를 골라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는 필연적으로 셔터를 남발할 수 없게 만든다. 최선을 다해 한 컷 한 컷을 기록한다면 나머지 시간은 눈의 직접 경험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 대는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절대로 사진에 담기지 않는다고. 실제로 적당히 아름다운 것은 사진에 더 아름답게 담길 수 있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반쪽만큼만 담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카메라와 렌즈의 종류와 가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얘기는 여기선 생략하기로 하자.)
그러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을 마주한다면, 적당히 담자. 최고의 사진을 남기는 것보다는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촬영을 아예 접어 버린다면 여행이 끝난 후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후회할 겨를도 없을지 모른다. 일상에 치여 내가 봤던 그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여행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날지 모르니.
정말 아름다운 것은 절대로 사진에 오롯이 담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우리의 가치 있는 기억을 끌어올리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여행의 사진첩을 정리하며, 여행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아야겠다고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카메라가 나의 여행에 조금은 방해가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