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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고래 Jun 27. 2022

5. 사랑이란 이름의 감옥, 가족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린다 : 네가 집에 오면 항상 최악의 상태가 되신다.
비프 : 제가 집에 오면?
린다 : 네가 올 날이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점점 더 불안해하시고, 정작 네가 도착하면 화가 난 것처럼 너와 말다툼을 하시지. 아마도 아버지는 네게 완전히 툭 터놓지 못하는 게 있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서로 미워서 안달이냐? 왜 그런 거냐?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62쪽)

윌리 : 이 집을 떠나거든 지옥에서나 타 죽어 버려라!
비프 : 도대체 제게 뭘 바라시는 거예요?
윌리 : 기차 안이든, 산속이든, 골짜기든,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반항심으로 네 인생을 두 동강 냈다는 것을 알길 바란다.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57쪽)

비프 : 아버지는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 이제 아셔야 해! 이 집에서는 단 십 분도 진실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59쪽)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부자. 한때 존경스러운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부자는 이제 원수다. 비단 윌리의 가정뿐만 아니다. 그들 모습은 바로 우리의 뒤틀린 초상이다. 윌리 부자가 원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의 부족? 교육의 실패? 자식의 반항? 물질적 조건? 이런 요인들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치는 것일까? 서로가 부족하고, 환경이 좋지 않으면 더 아끼고 사랑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유의 본질은 서로가 부족해서 생기는 원망이 아니다. 서로가 너무나 사랑하기에 일어나는 원망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지독한 애착. 부모는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고, 자식은 부모에게 의존하는 관계. 소유와 애착은 넘치는 사랑을 투여한다. 부모의 애착은 무균실과 같다. 무균실의 인간이 현실을 맞닥뜨리면, 자신을 침해하는 모든 것이 상처가 된다. 과도한 사랑이 빚어놓은 상처투성이 인간.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는 감정의 과잉에 빠진다. 부모는 기대를 저버린 자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니 무시한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지만, 그 책임을 자식에게 돌리는 아이러니. 그렇게 부모와 자식 간은 점점 원수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서로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넌 마음을 정해야 한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너희 아버지니, 정당하게 존경심을 표시하든가, 아니면 여기 다시 오지 않든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63쪽) 출구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리. 비프를 가족의 품으로 끌어 앉히기 위해. 질문으로 포장된 최후통첩을 날린다. 부모의 애착은 집요하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해서도. 자기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식 또한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 밖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펼치지 못한 자아는 다시 부모 곁을 향한다. 세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기에 존재 이유를 가족에서 찾는다. "다시 가족이 합치는 거지. 예전의 명예와 우정을 되찾을 거고."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74쪽) 밖에서 쪼그라든 관계는 가족 안에서 밀도를 높인다. 서로에 대한 애착은 점점 집착으로 변한다. 하지만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간섭과 냉소를 오가다 서로를 탓하는 원망으로 귀결한다. 가족은 사랑이란 이름의 감옥이 된다. 끝없는 원망의 굴레에 환멸을 느낀 비프. 탈출을 선언한다. "제발 절 좀 놓아주세요, 예? 더 큰일이 나기 전에 그 거짓된 꿈을 태워 없앨 수 없나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64쪽)


윌리 : 그런데 자네는 아이에게 뭘 하라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나? 아이에게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잖나.
찰리 : 아무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내가 사는 방식이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14쪽)


훌륭하게 자란 찰리의 아들을 보며, 윌리가 던진 질문. 특별한 교육방식은 없다. 그저 아무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찰리의 교육은, 자식을 방치나 방임으로 팽개쳐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 전제된 믿음이다. 믿음은 불필요한 간섭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여, 자식은 인정과 존중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소유적 관계가 아닌, 1:1의 대등한 관계. 다른 존재로서의 온전한 인정. 믿음은 상대의 가능성을 발현하여 존재를 격상(上)시킨다.

가족은 생명의 베이스다. 태어나서 베이스캠프를 토대로 성장하고, 때가 되면 광야로 나아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부모는 응원하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자연생태계는 부모와 자식 간에 원수가 없다. 부모에게 독립해서는 목숨을 건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향한 치열한 삶에서, 상처나 원망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를 옭아매는 애착은 그만. 각자의 삶에서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분투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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