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여자들 - 보고 듣고 말하기 #23
소녀는 사람을 먹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는 인간에게 식욕을 느끼고, 먹어치우지 않기 위해 고뇌하고, 이내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마주한다. <로우>는 그런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도로가 길게 뻗어있고, 저 멀리서 누군가 도로와 바투 붙어 걸어온다. 맞은편 방향에서는 자동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온다. 화면이 전환되고 걸어오던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엔진의 기계음은 점점 커진다. 그리고 차량이 다시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숨어있던 이가 급작스레 차를 향해 달려든다. 차는 가로수를 박고 멈춘다. 희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도로에 깔린다. 마치 누군가 등장할 차례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도로를 따라 걷던 이는, 질주하는 자동차에 몸을 날린 이는, 이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차량에 다가간다. 관객은 그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원거리에서 보여준다. <로우>의 첫 장면이다. 영화 중반에 다다라서야 관객은 첫 장면의 숨겨진 뜻을 알아차리게 된다.
쥐스틴은 막 수의대학에 입학한 열일곱 살 소녀다. 그곳은 부모님의 모교이며 친언니가 재학 중인 학교이기도 하다. 학교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밥 한 끼 편히 먹을 수 없다.
쥐스틴의 가족은 채식주의자다. 매시 포테이토를 달라는 쥐스틴의 말에 뷔페식당의 종업원은 스홉으로 접시를 내리치듯 음식을 던진다. 그리고 퉁명스레 묻는다. “단백질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담담히 말하는 쥐스틴의 모습에서 그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테고,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해 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식사하던 도중 쥐스틴은 돌연 입에 있는 음식을 내뱉는다. 접시 위에 쥐스틴이 머금고 있던 매시 포테이토와 미트볼 조각이 떨어진다. 어머니는 혹여 쥐스틴이 미트볼을 씹거나 삼키지 않았는지 재차 확인한다.
관객은 자연스레 불친절했던 종업원의 태도를 떠올리며, 혹여 저 말라비틀어진 단백질 덩어리에 어떤 악의가 숨어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게 된다. 물론 평범한 실수일 가능성이 크다. 고객에게 불친절한 종업원은 으레 제 일에도 무신경할 테고, 그 무감함이 하필이면 매시 포테이토 통에 미트볼 한 조각이 떨어지는 불상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불행은 경중에 상관없이 늘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찾아온다. 대다수 사람은 타인의 불행이나 자신의 불행에서 연유를 캐내려 한다. 불행 그 자체보다 이유 없음이 더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불행에 이유는 없다. 생(生)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 때때로 하찮은 우연이 누구도 의도치 않은 결과를 자아내고, 누추하게도 생은 그에 강제될 뿐이다.
어쩌면 매시 포테이토 통에 미트볼이 들어간 것은 쥐스틴에게 음식을 준 종업원이 아니라 다른 직원이 저지른 실수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날따라 그 종업원의 기분이 언짢을 만한 일이 있었고, 유독 쥐스틴에게 퉁명스레 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업원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이 종업원에게도 의도하지도 예측하지도 않은 불행은 아닐지 추측해볼 따름이다. 때때로 우리는 불행을 감내하고자 누군가에게 적의를 품는다. 모든 고난과 구차함을 다른 이의 탓을 돌린다면, 적어도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까.
어머니와 종업원은 말싸움을 벌이고, 아버지와 쥐스틴은 불편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기어코 불행은 일상의 리듬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누구든 그것과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고역이다. 그리하여 대체로 불행이 찾아들 때 우리는 입안의 것을 삼키지도 내뱉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쥐스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접시에 당도한 미트볼은 하찮은 불행이다. 못 본 척 냅킨에 말아 식탁 한 귀퉁이에 두면 그만이다. 그러나 쥐스틴의 어머니는 그리하지 않는다. 미트볼은 ‘이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속한 세계에 있어 허용될 수 없는 다른 존재의 살덩어리, 존재 자체만으로도 부당하고 부정한 모욕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식당 한가운데서 선언하듯 소리 지른다. 우린 채식주의자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호한 선언으로 관객은 저 강박에 다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지는 않나 의심하게 된다. 쥐스틴의 어머니는 자신의 기준에서 조금의 예외도 허용하는 법 없이 쥐스틴을 키워왔을 것이다. 어째서 쥐스틴의 어머니는 그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이토록 그를 보호하려 애를 쓰는 것일까. 자식이 아무리 장성하더라도 언제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애달픈 게 부모의 마음인 것일까. 어쩌면 쥐스틴 역시 품었을지 모르는 이 의문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차차 해소된다. 그 과정이 <로우>의 서사적 긴장감을 높인다.
쥐스틴과 가족들은 학교 주차장에 도착하지만, 마중 나오기로 한 쥐스틴의 언니 알렉스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결국 부모님은 쥐스틴을 두고 떠난다. 막내딸을 껴안으며 응원의 말과 작별의 키스를 보내는 아버지의 입술 위에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인중의 상처가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는 셔츠 단추를 풀어 쥐스틴에게 자신의 가슴에 가득한 상처를 내보인다. 인중의 상처는 가슴의 상처를 예고하는 장치이다. 쥐스틴이 입회 의식에서 삼켜야만 했던 토끼 콩팥이 미트볼과 이어지는 동시에, 앞으로 그가 끊임없이 느끼게 될 인육에 대한 갈망을 예고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버지의 상처 입은 입술은 그가 딸을 보내며 말하지 않은 혈통의 비밀을 환기한다.
인중의 상처는 또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남긴 첫 상처라는 점에서 스티그마, 즉 성흔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는 그가 아내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는 희생을 치렀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불행이 그의 생에 남기고 떠난 폭력의 세례이다. 아버지가 지닌 성흔은 두 딸에게도 이어진다. 알렉스는 손가락을 잃고, 쥐스틴은 뺨에 흉터가 생긴다. 그가 아내의 피를 이어받은 딸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뿐이다. 이 지점에서 쥐스틴의 여정은 필연적으로 결여를 확인하는 여정일 수밖에 없다.
육체에 남은 외상(外傷)은 내면의 격정이 표출된 상흔인 것이다. 알렉스와 쥐스틴의 관계도 그들이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들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는 그들 자신의 자매뿐이다. 같은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유일하게 그들을 해칠 수 있다. 오로지 자매만이 그들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이다. 알레스와 쥐스틴의 자매애는 세상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울타리이자, 서로를 옥죄는 족쇄가 된다.
쥐스틴이 학교에서 겪는 사건의 본질은 식인이 아니라 진실을 목도하는 데 있다. 쥐스틴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최후를 향해 나아간다. 쥐스틴은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성공함으로써 파멸에 이른다. 은폐되고 통제되어 온 자신의 근원적 욕망의 진실을 알게 될 때, 그가 믿어온 세계는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소녀는 어른이 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 대입해보자면 알렉스는 목자이고 쥐스틴은 오이디푸스인 셈이다. 오이디푸스가 거듭하여 진실을 말하라 재촉하자 목자는 탄식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제는 무서운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한다. 목자의 절규를 들은 오이디푸스는 결연히 선언한다.
“어떤 무서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들어야겠다.”
진실이 우리를 파멸로 인도할지언정,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듣거나, 듣지 않거나.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구원은 그 후의 문제이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손으로 제 두 눈을 뽑아 바쳤다. 그렇다면 쥐스틴은 무엇을 바치게 될까. 우리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그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갈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기숙사에 도착한 첫날밤 신입생들은 도축장으로 향하는 짐승처럼 숙소에서 끌려 나온다. 선배들은 너저분한 흰 가운을 입고 있다. 그들은 쥐스틴의 룸메이트인 아드리안의 짐을 패대기친다. 아드리안이 잠시 반항하긴 하지만 쥐스틴과 아드리안 역시 다른 신입생들처럼 복도로 내동댕이쳐진다.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 신입생들 대다수는 옷조차 제대로 입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 부당함을 느꼈기에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어려 있지만 입은 굳게 닫혀있다. 선배들은 자신이 신입생 시절 받았던 그대로 후배들에게 행한다. 그들은 이 거칠고 무례한 성인식을 통과했다. 때가 탄 가운은 표식이다. 배신자와 일원을 구분하는 기준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는 증거이다.
선배들은 복면을 쓴 채, 이미 충분히 순종적인 신입생들을 계속해서 몰아붙인다. 민낯과 복면 사이의 시선 간에는 자연스레 위계가 생긴다. 복면을 쓴 이들은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민낯인 이들은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다. 복면은 개인의 특질을 지워주고 제복은 동질감을 준다. 복면도, 제복도 없는 이들은 자신의 특질을 고스란히 내비칠 수밖에 없으며, 소속을 상실한 채 부유하게 된다.
신입생들은 두렵다. 그들은 배신자로 찍혀 단체 사진에서 얼굴이 지워지는 수모를 겪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침묵한다. 복면과 제복이 지닌 힘을 알기에 자연스레 선배들의 지시에 따른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시켜도 그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스무 살 초입인 그들은 복종하는 법부터 배운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면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신입생들은 하강한다. 줄을 맞춰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향한다. 계속되는 하강은 대학교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그들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인식시킨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자 그들은 네발로 기어가라 명령받는다. 마치 그들이 앞으로 수의사가 되어 다루게 될 동물처럼 말이다. 폭력과 억압이 구조와 질서를 갖춰 강제될 때, 인간은 기대 이상으로 순종적이다. 신입생들은 이 성인식에서 함께 비천해짐으로써, 또 고난을 겪음으로써 서로에게 친밀감을 가진다. 아드리안이 쥐스틴에게 별일 아닐 것이라고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단기간 안에 집단적 친밀감을 부여하려 한 선배들의 전략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네발로 기어가던 신입생들은 마침내 지하에 있는 클럽에 도착한다. 폭력의 가장 밑바닥에는 향락과 방종이 자리하고 있다. 복면과 고함 대신 상기된 얼굴과 음악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채찍 뒤에 오는 당근을 기쁘게 받아먹음으로써 신입생들은 그들이 받은 모멸감과 수치를 기꺼이 ‘전통’이라 부른다. 이제 그들은 폭력의 공범이 될 준비에 막 착수하였다.
클럽에서 쥐스틴은 사람들에 떠밀리면 안으로 들어간다. 표정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쥐스틴은 알렉스와 만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자매는 클럽을 나와 밖으로 나간다. 장면이 바뀌고 화면은 암전 된 듯 깜깜하다. 알렉스는 손전등으로 빼곡히 들어찬 어둠을 부수고 빛 한줄기를 드리운다. 알렉스는 벽에 걸린 사진들 사이에서 신입생 시절 입회 의식을 마친 부모님의 모습을 찾아 쥐스틴에게 보여준다. 부모님의 사진은 두 자매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거울의 너머에는 흰 가운을 입고 피를 뒤집어쓴 부모님의 모습이, 기원이 불분명한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쥐스틴은 자신이 물려받을 것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드디어 쥐스틴만의 성인식이 준비되었다.
니체의 말대로 누군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그이를 들여다보기 마련이다. 쥐스틴은 세계가 가하는 폭력과 마주하게 되고, 폭력은 쥐스틴을 차차 물들인다. 수의대라는 공간에서 인간과 동물 간의 구도는 선배와 신입생들, 그리고 자매와 나머지 인간들이라는 구도로 두 번 변주된다. 쥐스틴은 알렉스에 의해 깊은 어둠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어둠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둠에 깊이 몸을 담그고 한 걸음씩 전진하여 반대편으로 나오는 길밖에 없다. 어둠에 떨어진 이를 꺼내어 일상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