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치, 어느 독일인, 어느 인간 - 보고 듣고 말하기 #22
<어느 독일인의 삶>은 인터뷰집이다. 인터뷰어인 토레 D.한젠은 인터뷰어로서의 개입과 서술을 최소화하고, 인터뷰이인 브룬힐데 폼젤의 구술을 중심으로 책을 구성하였다. 본문에서 질문마저 제거함으로써, 독자는 폼젤의 구술과 제한적으로 제시되는 한젠의 부연설명만을 기반으로 독해를 이어나가야 한다. 폼젤은 뛰어난 기억력을 보여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명확한 원인을 말하길 회피하고, 그의 진술은 솔직하지만 자기중심적이다. 독자는 폼젤의 구술에서 그의 삶과 시대적 양상을 해석할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지만, 이내 그 단초는 모호함과 판단 불가의 영역으로 사라진다.
이는 인터뷰이인 폼젤의 삶에 내재한 복잡성, 그가 보이는 회피성과 자기방어적 기질, 확실한 인과 구조가 아니라 다층적 구조의 텍스트로서 인터뷰이의 삶을 바라보려는 인터뷰어의 욕망이 한데 뒤섞여 나타난 결과이다. 기실 인터뷰는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텍스트이다. 서술자와 진술자가 분리되어 있기에 독자는 서술자를 통해 재현된 진술자의 목소리를 접한다. 서술자인 인터뷰이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인터뷰어를 몰아붙이고 싶은 야심을 품을 수밖에 없고, 진술자인 인터뷰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터뷰는 질문과 답변만이 전부인 플랫한 텍스트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뛰어난 인터뷰는 인터뷰어의 통찰력과 인터뷰이의 솔직함, 서술자와 진술자 간 신뢰감 모두가 갖춰졌을 때 탄생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문답 사이의 행간이 존재한다. 잠시의 머뭇거림, 예상치 못한 고백,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온 단말마 등. <어느 독일인의 삶>이 얼마큼 뛰어난 인터뷰집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책에 실린 인터뷰에는 행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911년 독일에서 태어난 폼젤은 20세기 초에 태어난 수많은 이와 마찬가지로 유년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을 경험했으며, 전 세계를 휩쓴 제2차 세계 대전도 경험하였다. 동시에 폼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나치의 핵심 인물인 요제프 괴벨스의 비서로 일하였다. 그 점에서 그는 다른 수많은 이들과 명확히 구분된다. 논쟁적 인물의 삶을 명확한 프레임으로 제시하는 일은 간편할뿐더러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위대하다고 알려진 인물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천박하다는 악명을 지닌 인물은 남루하게 그려내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한젠은 편하고 쉬운 길을 피하고, 폼젤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진술에서 다층적 삶의 장면을 건져내려 하였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뤄보자. 한나 아렌트와 이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이 책에도 적용하여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대체로 악은 불타오르는 악의와 확신으로 가득한 잔혹함으로 시작하여 순응과 침묵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그러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폼젤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우리는 패전 직전의 상황에서 벙커로 되돌아와 자리를 지킨 그의 내밀한 욕망에 관하여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나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어요. 돈을 번다는 건 착실하고 명예로운 일이었죠. 하지만 프로미에 들어간 건 좀 순진했어요. 난 가끔 그랬죠. 하지만 프로미에 들어간 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 혹시 책임이 있다고 해도 나는 몇 번에 걸쳐 벌을 나누어 받았다고 생각해요. - p138
브룬힐데 폼젤은 명민한 젊은이였다. 남동생 넷을 둔 장녀로서 또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지 않은 시대의 젊은이로서, 그가 더 높은 수준의 교육과 더 나은 환경의 일자리를 가질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폼젤은 쉽지 않은 확률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였다. 딱히 유대인이 혐오스러워서, 공산주의자가 증오스러워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그 시대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이해타산에 따라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시대를 안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식민지의 수많은 영특한 젊은이들은 폼젤과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총독부 관리로서, 군관학교 생도로서, 만주국 장교로서, 어용 문인과 언론인으로 사는 삶을 택했다. 그 합리적인 결정이 쌓였기에 일제강점기는 1919년 이후에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1933년 이후에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 버렸죠. 물론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는 있었겠죠. 예를 들어 내 경우, 에바 뢰벤탈을 매일 찾아가 도움을 줄 수는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기엔 에바 집이 가깝지 않았어요. 게다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법도 없었어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자기가 번 돈을 먹는 데 쓰지 않고 담배를 사는 데 써버리는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죠. 우리 친구들의 생각이 그랬어요. 아무튼 사람은 자기 판단대로 살 수밖에요. - p141
그는 유대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에바 뢰벤탈이라는 유대인 출신의 친구도 있는 이였다. 인테리어 업자였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유대인 유산계급 출신의 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치를 택했다. 패전의 순간까지 그는 제자리를 지켰고,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특별 수용소로 끌려갔다. 석방 이후 폼젤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시민으로 살다 2017년, 106세에 생을 마감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폼젤은 자신이 과도하게 비난받아 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요. 난 책임이 없어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대체 뭣에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요,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랬어요. 나도 물론이고요. - p137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내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도 없어요. 그건 세상으로부터 나치라고 지목된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어요, 민족이라는 게 뭐죠? 모두가 함께 속한 바다와 같은 게 아닌가요? 이리저리 출렁이는 바다 말이에요.- p140
폼젤의 항변은 불편하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이 품은 출세욕과 기회주의적 면모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 자신은 그 시절 다른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관심했을 뿐이라고. 그 무관심이 죄라면, 왜 자신만 더욱더 비난받아야 하느냐고.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살았을 뿐이라는 그의 말에는 분명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 시절 일반 독일 국민들은 크든 작든 나치에 협력하였다. 누군가가 앞장서 나치를 찬미하였고, 나머지는 뒤에서 찬미를 따라 되뇌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시대적 한계를 내포한 합리성이었다. 그가 내린 선택이 지극히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단죄의 칼날은 갈 길을 잃는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완전히 잘못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호도한 나치 자신들, 즉 나치 지도부만 빼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었어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계층만의 무관심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에도 늘 반복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무관심을 말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일들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어요. 또 수백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죽는 것도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방송이 끝나면 금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즐겁게 저녁을 보내죠. 그런 걸 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지도 않아요. 그런 게 인생이겠죠. 모든 게 그렇게 섞여 있는 게 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 p142
폼젤은 괴벨스의 비서로 일하기 전인 1942년 국민 계몽 선전부에서 근무하였다. 여론 조작과 선동을 통해 독일 제3제국 신민들의 전의를 고취하고자 하는 특수한 목적을 지닌 부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나치가 국민들을 속이는 방식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자행한 강간을 부풀려 보도함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것을, 유대인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아이히만 역시 마찬가지 논리로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자신은 체제 속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이들의 모습은 더없이 무책임하지만, 그래서 무척이나 인간적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들에게 인간적 면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불쾌해진다. 그들이 악의 화신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함,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무책임하며, 적당히 개인의 안위를 챙긴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대망상적인 현실 인식, 인종차별적인 사상을 지닌 과격주의자 무리가 처음 세상을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들이 세를 불리고 테러를 저지르고 여론을 호도할 때, 사람들은 조금씩 그들을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 인정하였다. 여하튼 그들은 변화를 몰고 올 거라고 기대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합법적인 절차로 무너졌고, 나치는 독일과 유럽을 전화로 몰고 갔다. 유대인들과 집시,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을 학살했다. 독일 제3제국의 탄생은 나치에서 시작하였지만, 다수의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완성되었다.
브룬힐데 폼젤과 마찬가지로 1911년 독일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마르타 힐러. 신문 기자였던 그는 나치 독일 패망 직전과 직후인 1945년 4월 20일부터 같은 해 6월 22일까지의 일기를 남겼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에서 마르타 힐러는 무너지는 일상, 공포, 숱하게 벌어진 강간, 삶의 환멸과 애착을 세밀히 기록하였다. 강간과 추행의 위협이 조금씩 덜해지고 러시아 군 당국의 지시에 따라 질서가 회복되어 가던 1945년 5월 27일, 마르타 힐러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제부터 전기가 들어온다. 촛불에 의지해 살던 시절은 지나갔고, 문을 두드리던 시절도, 침묵만 흐르던 시절도 끝났다. 라디오에서 베를린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은 거의 언제나 뉴스와 비화, 피비린내 나는 사건, 시신 발굴, 잔학행위들을 보도했다. 동부 지역에 있는 대형 강제수용소들에서 수백만의 사람이 불태워졌으며, 대부분 유대인이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신을 태운 재로 비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든 것이 두꺼운 장부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마저 꼼꼼하게 기록하다니, 그야말로 착실한 민족이다. 밤늦게 베토벤의 곡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나는 방송을 꺼버렸다.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 -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기록하였다.
(전략) 독일 땅에 들어서자마자 뭘 본 줄 알아? 손으로 쓴 플래카드. 길가에 걸린 플래카드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여기 이곳이 바로 저주받은 독일 땅이다!’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어…… 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더군. 마을 사람들이 집이고 세간이고 다 그대로 둔 채 자전거로 몸만 빠져나간 뒤였지. ‘러시아 군인들이 오면 사람들을 베어 죽이고, 찔러 죽이고, 잘라 죽일 것’이라고 한 괴벨스의 말을 곧이들은 때문이었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없거나 살해당하고 독살당한 주검들뿐이었어. 아이들도 죽어 누워 있고. 보니까, 다들 스스로 총을 쏘거나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더라고…… 그 광경을 봤을 때 우리가 어땠을 것 같아? 솔직히 기뻤어. 우리가 승리했고, 이제 그들도 우리처럼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이 기뻤지. 원수를 갚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아이들만은 불쌍하더라고……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남아 있었어. 내가 그 할머니에게 그랬지.
“우리가 승리했어요.” 할머니가 우는 거야.
“우리 아들 둘이 러시아에서 전사했다오.”
“그게 누구 때문이죠? 우리 병사들이 얼마나 많이 죽은 줄 알아요?”
할머니가 대답했어. “히틀러……”
“히틀러 혼자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네 아들들이 남편들이 그런 거라고요.……” 그러자 할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독일까지 걸어서 갔어.……
엄마한테 이야기하고 싶었지…… 하지만 엄마는 전쟁 중에 굶어 죽어서 안 계셨어.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 빵도 소금도. 정말 아무것도. 오빠는 중상을 당해 병원에 있었고. 여동생 혼자 집에서 나를 기다렸지. 동생이 편지에 이렇게 썼더라고. ‘우리 군이 오룔(러시아 서부 오룔 주의 중심도시)에 들어오자마자 쫓아가서 소녀병사들마다 붙잡고 일일이 군용외투 자락을 들추며 혹시 언니가 아닌지 확인했어.’ 동생은 내가 소녀병사들 중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야. 내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니나 페트로브나 사코바, 중의, 의사보조 p513-p515
전쟁이 지난 후에도 상흔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순간을 떠올린다. 브룬힐데 폼젤은 그저 명령 받은 대로 열심히 살아온 시기로, 마르타 힐러는 조국이 저지른 참혹한 범죄에 아연실색한 저녁으로, 니나 페트로브나 사코바는 적국의 노파와 나눈 대화로 전쟁을 기억한다. 폼젤의 진술은 뒤의 두 진술과 함께 읽을 때 보다 섬뜩하게 다가온다. 폼젤의 항변이 뒤의 두 진술과 함께 읽힐 때, 우리는 그가 말하지 않으려 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어느 독일인의 삶>에 담긴 진술과 행간이 1945년 독일을 떠올리는 데 있어 꼭 필요한 텍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