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끝내고 돌아섬에 - 보고 듣고 말하기 #21
계절은 저마다 완성되는 때가 있다. 여름은 시작과 동시에 완성되어 온다. 녹음이 우거진 대지의 자태는 초여름에 눈부시게 빛난다. 가을로 향해갈수록 여름의 정취는 무더운 공기에 뒤덮여 쇠퇴해간다. 가을은 계절의 끝자락에야 완성된다. 낙엽이 지고 짓밟혀 짓무를 때, 가을은 끝과 함께 완성된다. 사랑은 찾아옴과 동시에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의 부추김 때문에, 그들을 오래도록 행복했다는 동화적인 결말 외에 그 어떤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아 보이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런 것처럼. 사랑의 시작은 초여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눈부신 나날과 닮아있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사랑이란 행위는 그를 떠나보내는, 혹은 그에게서 떠나오는 순간에야 완성된다. 가을이 그러한 것처럼. 완전해질 수 있는 사랑은 결코 없기에 상대와의 모든 불확실성을 포기하는 이별의 때에야 사랑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이별이 찾아오면 사랑은 자신이 내포한 가능성을 베일 뒤에 감추고 사라진다. 짓무른 낙엽처럼 추억은 일상의 발자국에 밟혀 조금씩 퇴색한다. 너무 이르게 이별을 택한 사랑은 때를 잘못 고른 탓에 완성되지 못하고, 이별의 아픔만이 오래도록 지속하기도 한다. ‘체실 비치에서’는 서투른 이별 탓에 사랑의 종지부를 찍고 돌아서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1962년 초여름,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결혼식을 올린다. 신혼여행으로 그들은 영국 남부 도싯 주,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을 걸어 호텔로 향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있고, 발걸음은 가볍다. 첫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됐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약간의 서투름과 어색함 속에 오해는 싹트고, 그들은 호텔 방을 나와 체실 비치에서 언쟁을 벌인다. 첫사랑의 서투름은 예상치 못한 이별을 불러오고, 그들은 헤어짐을 택한다. 사랑이 완성되었노라 생각하며 행복을 만끽했던 장소에서. 플로렌스는 홀로 돌아선다. 에드워드에게 말하지 못한 아픔을 끝내 말하지 아니하고.
이건 아니야
뭐가?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아직은.
이별을 택하고도 에드워드는 오랫동안 플로렌스를 잊지 못한다. 존중과 이해 속에서 헤어지지 못했기에, 그는 자꾸만 이별을 곱씹는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찾기 위해서. 같이 돌아가자는 플로렌스의 손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며.
바라건대 저마다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면, 이별에도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한 치의 오차나, 예외를 두지 않고 이별에게도 배정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좋겠다. 이별이 정해진 기간만큼 슬퍼하고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떠나보낸 사랑을 마주하는 일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상처가 아문 자리에는 흉터가 남기 마련이다. 이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이별이 할퀴고 지나간 곳은 언젠가 아물지겠만, 그 흔적이 사라지는 건 상처가 아문 시간의 배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상처를 잊고 지내다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흉을 더듬으며, 우리는 이 곳에 무언가 자리했음을 찬찬히 기억해보려 할지도 모른다. 이별에도 자리가 있기를 바라는 일은 철없는 바람이란 걸 모르지 않지만, 다만 이별하는 일에 보다 담담할 수 있기를.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재회한다. 그들의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는 무엇이 담겨있던 걸까. 때때로 어떤 눈물은 눈꺼풀이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