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자들 - 보고 듣고 말하기 #24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머나먼 곳으로 떠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사랑의 열병도 결국은 지나가고야 만다. 한때의 정념이 남긴 흔적을 더듬을 때,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눈이 멀고 입이 막혔음을 알게 되고, 세상과 너무 외따로이 떨어져 있지는 않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오직 사랑만이 사랑에 빠진 자의 구원이 될 수 있다. 끝내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한 자만이 사랑으로부터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든 사랑은 불시착하기 마련이다. 연애담이란 결국 사랑이 실패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실패한 사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화되거나 잊힌다. 대저 사랑은 실패를 예정하고 시작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끝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군다. 미화와 망각은 사랑을 매듭짓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자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하는 위안이다. 아름다운 부분만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양극단의 선택 외에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구원해줄 방법은 없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사랑이 산산이 깨지고 나서야, 사라진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사랑과 함께 떠나보낸 이와 영영 마주하지 못할 것이란 슬픔에 휩싸인다. 그래서 때에 따라 사랑은 불시착하는 바로 그 순간,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이런 까닭에 어떤 이들에게 파국은 남은 생을 버틸 힘이 된다.
<불한당>은 정념에 휩싸인 사랑이 야기한 파국을 담아낸 영화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생에 깊게 상흔을 남긴 이야기이다.
누아르, 불한당
누아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기존의 갱스터 영화와 탐정 영화가 대공황기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바탕으로 변형되어 만들어져 크게 유행한 장르이다. 초창기 누아르 영화는 도시를 배경으로 '프롤레타리안 터프가이’로 불리는 하층계급 출신 남성 주인공이 폭력과 동물적 감각을 바탕으로 여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전통적인 남성중심주의적 가치를 파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선으로 투입된 남성을 대신하여 후방의 여성들이 생산과 사무업무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의 여성 노동 인력은 거의 60% 증가했으며, 새로 노동자가 된 여성 중 4분의 3이 기혼 여성이었다. 배관과 용접을 비롯한 육체노동 외에 사무직에서도 활약하는 여성이 늘면서, 미국의 사회 모습은 대공황 시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런 변화는 백인 여성뿐만 아니라 흑인 여성들 역시 체감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다수 흑인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제활동은 백인 가정집의 하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흑인 여성들 역시 전보다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정부 역시 미국 본토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의 후방 보급기지로서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게끔 이런 흐름을 장려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전쟁 초기에는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극히 예외적 상황으로 인식했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일을 자아실현과 연관 지었다. 종전 후 여성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에 극렬히 저항한 까닭은 그들이 남성 의존적인 여성상이 보급되던 대공황 시기의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수리공으로 일하던 한 여성은 <커내디언 홈 저널> 1945년 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병아리를 다시 알 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 영혼이나 마음이나 정신이 반드시 파괴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변화를 사회적이자 개인적인 위험으로 느꼈는데, 초창기 누아르 영화에는 당시 남성들의 이런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당시 누아르 영화에는 자신의 목소리와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로 여성상이 제시되긴 했지만, 여성의 목소리를 철저히 대상화하여 영화적으로 재현했을 뿐이었다. 제이니 플레이스(JaneyPlace)는 누아르 영화가 내러티브를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처음에는 허용하다가, 나중에는 파괴한다”라고 말했다. 영화 <불한당>도 제이니 플레이스가 지적한 문제를 어김없이 반복한다.
<불한당>은 누아르 영화이다. 그러나 동시에 <불한당>은 로맨스 영화이다. 기실 누아르와 로맨스의 접목은 매우 흔한 클리셰다. 누아르 장르에서 로맨스는 주로 서브플롯으로 활용된다. 누아르 장르 속 남성 주인공과 여성 인물 사이의 사랑은 남성 주인공을 각성시키거나, 서사의 비극적 결말을 정당화하는 등의 수단으로 소비되어왔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인물은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타자화된다. 여성 인물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닌 주체의 기능에서 철저히 배제당한다. 오직 남성 주인공만이 극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독점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여성 인물은 욕망이 제거당하고, 오로지 남성 주인공의 욕망을 충실히 재현하고 체화하는 객체로 자리매김된다.
여성 인물은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그려지든, 팜므파탈로 그려지든 모두 철저히 남성의 시선에 따라 재단당한다. 지금까지 많은 누아르 영화가 여성 인물을 성녀-창녀의 이분법으로 도식화해왔다. 성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성녀, 성적으로 매력적이며 위협적이기까지 한 창녀라는 구도를 통해 누아르 영화는 극 중 모든 여성을 소비한다. 남성 주인공이 숭배하는 순결한 희생양 혹은 남성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로 말이다. 이런 도식에 대한 피로도가 증가함에 따라 누아르 장르는 클리셰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누아르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극 중 인물들과 동일한 상황에 빠진다. 남성 관객은 남성 주인공의 시선을 빌려 여성이 대상화되고 목소리를 상실한 상황을 자연스러운 일이라 내면화한다. 반대로 여성 관객은 객석에 포박된 채, 남성 주인공의 시선을 수용하는 이율배반적 선택을 하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그렇게 여성 관객은 여성 혐오를 내재화하며, 남성 관객과 달리 여성 혐오 수용의 과정에서 지속해서 자기 분열을 겪게 된다. 그렇기에 누아르 영화는 가부장제 사회가 허구의 남성성을 쌓아 올리고 여성 혐오를 재생산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다.
<불한당>은 비록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여타의 누아르 장르 영화의 공식을 답습한다. 이 영화가 누아르 장르의 변형을 시도한 지점은 그간 부차적인 요소로 여겨져 온 로맨스 서사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달콤한 인생」(김지운, 2005)을 통해 김지운 감독이 멜로적 서사를 누아르에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불한당>은 퀴어 서사를 끌고 들어옴으로써 누아르 장르에서 규정화해 온 로맨스 서사 공식을 비틀었다.
한국의 누아르 영화는 1980년대 중후반 홍콩 누아르의 열풍과 함께 태동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게임의 법칙」(장현수, 1994), 「초록물고기」(이창동, 1997) 같은 영화가 등장했는데, 「친구」(곽경택, 2001)를 800만 관객이 보고 난 뒤부터 「달콤한 인생」, 「비열한 거리」(유하, 2006), 「우아한 세계」(한재림, 2007) 같은 누아르 영화가 연이어 개봉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식 누아르는 「조폭 마누라」(조진규, 2001), 「두사부일체」(윤제균, 2001) 시리즈를 위시한 조폭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의 토대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가장 최근 개봉한 한국식 누아르 영화 중 화제가 된 작품을 꼽아보자면 「신세계」(박훈정, 2012), 「차이나타운」(한준희, 2014), 「아수라」(김성수, 2016), 「VIP」(박훈정, 2017) 등이 있다. 「차이나타운」을 제외한 나머지 세 영화는 모두 철저히 복수(複數)의 남성 주인공들의 욕망을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인물들은 주체적인 시선을 획득하지 못할뿐더러 남성 주인공들에게 욕망의 투사체로서 주어짐으로써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응시된다.
근래 한국적 누아르 영화의 경향을 살펴보기 위해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와 「VIP」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던 「신세계」와 달리 「VIP」는 개봉 후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의 아들이자 연쇄살인마인 김광일의 악행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여성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었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다. 「VIP」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대다수는 강간당하고 죽거나, 그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여성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피해자 여성들이 납치, 고문, 살해당할 때마다 카메라는 여성의 육체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인물들의 육체가 훼손되고 최후를 맞이할 때 관객은 철저히 가해자의 시선으로 상황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가 끊임없는 고통의 전시로 이루어낸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곳에서 갈가리 찢겨나간 여성의 육체는 피해자 여성 인물의 것이 아니다. 그 육체는 누가 더 강한 ‘수컷’인지 경쟁하는 남성 인물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트로피이며, 남성들이 허구의 남성성을 증명받고자 하는 욕망이 물화(物化)한 마네킹에 불과하다.
박훈정 감독이 각본 작업에 참여했던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2010)와 비교했을 때도 「VIP」는 고통과 가학을 전시하는 데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러나 「VIP」라는 문제적 영화가 어떤 작품들을 계승하여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할 때 박훈정 감독의 전작 「신세계」가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신세계」는 언더커버 누아르 영화 「무간도」(맥조휘·유위강, 2002)의 영향을 깊게 받았는데,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다음과 같이 이 영화를 평했다.
“「신세계」는 기존 누아르 작품들을 단순히 연상시키는 기시감의 영화가 아니라 정확히 호출하는 영화이다. 단지 「무간도」를 가지고 운운할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무간도」의 설정이 「삼합회」(곽요랑, 2009)의 상황을 맞아 「도니 브래스코」(마이클 뉴웰, 1997)의 갈등을 거쳐 「대부」(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2)의 결말로 치달아가는 이야기이다.” 「신세계」는 허지웅에 의해 언급된 네 개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여성 인물을 배경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신세계」에서 주목해야 할 사건은 강 과장과 이자성 사이의 접선책인 ‘신우’의 죽음과 이자성의 아내인 ‘유경’의 유산이다. 두 인물 모두 표면적으로는 자신만의 영역과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깊숙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들의 영역과 목소리, 그리고 욕망은 모조리 남성 인물의 유산에 불과하다. 신우는 강 과장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고 수호하는 수족이며, 유경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강 과장의 지시에 따라 이자성과 결혼한 인물이다. 꽁꽁 묶인 채 드럼통에 갇혀 이자성을 바라보는 신우의 육체가 스크린에 비칠 때, 유경이 유산하여 다리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릴 때 그들의 육체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의 작동은 다분히 기계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VIP」에서 문제가 된, 고통에 대한 무관심으로 점철된 시선이 잠재되어 있음을 얼핏 엿볼 수 있다.
물론 애초에 누아르 영화가 ‘남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누아르 장르가 어떻게 ‘남성 서사’로 자리 잡게 되었느냐다. 누아르 장르는 타자의 자리에 여성을 위치시켜 놓음으로써 가상의 남성성을 생산하고 소비해 왔다.
개봉 당시 「신세계」는 정청과 이자성 사이의 ‘브로맨스’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브로맨스로 호명되는 관계란, 호모소셜리티(Homosociality)에 따른 제한과 한계에 의해 은폐된 성적 긴장감에 근거한다. 이 지점에서 누아르 영화가 끊임없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까닭에 가부장제 사회의 호모소셜리티, 즉 남성연대에 대한 반영이 자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적 욕망은 ‘동일화’(Identification), ‘가지고 싶은 욕망’(Libido. Cathexis)으로 나뉜다. 남자아이는 아버지를 자신과 동일화하고, 어머니를 가지고 싶어 하면서 비로소 남성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애자 남성’이 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동성애자는 동일화와 가지고 싶은 욕망의 분화가 실패하여 동성에게 이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게 된 사람이다. 세지윅은 호모소셜리티 안에 호모섹슈얼적 욕망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 간 성애(性愛)가 지고의 사랑으로 여겨진 까닭은, 당시 그리스 사회가 여성은 ‘시민’이 되기 부적절하다는 혐오를 바탕으로 이뤄진 ‘남성 시민’ 사회였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공고한 호모소셜리티를 구축하고 있지만, 자신이 여성화(Feminize)되어 성적 객체로 전락하지는 않을지 두려움을 가진다. ‘삽입당하고, 소유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성적 주체인 남성 간에 서로를 객체화하는 호모섹슈얼한 시선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남성에게 ‘계집애 같다’라는 말은 모욕으로 작동한다. 세지윅은 호모소셜리티는 호모포비아에에 의해 유지되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객체화를 통해 성적 주체인 남성의 주체성이 확인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브로맨스’란 단어는 성적 주체인 남성이 성적 객체로 전락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기제이자, 호모소셜리티를 정당화하고 은폐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특히 ‘수컷’들의 서사인 누아르 장르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승인될 수 없기에 남성 간의 성적 긴장감은 ‘의리’와 같이, 안정성을 승인받은 기존 언어의 탈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한당>은 성적 긴장감을 보다 감각적으로, 더욱 중요하게 다룸으로써 누아르 장르의 혁신을 일정 부분 달성했다. 이 지점에서 <불한당>과 함께 언급되어야 할 영화는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다. 각각 불한당원, 아수리언이라는 열성적 팬덤을 만들어낸 두 영화는 모두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서브플롯으로 즐겨 사용하던 로맨스 서사를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불한당>과 「아수라」 모두 성적 긴장감은 남성 인물 사이에서 발생한다. 전자가 노골적으로 퀴어 로맨스 서사를 차용했다면 「아수라」는 조금 더 은밀한 방식으로 남성 인물 사이의 성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극 초반 경찰 파트너인 한도경과 문선모는 명확한 주종관계로 그려진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둘의 관계에 금이 가며 종래에는 파멸에 이른다. 성적 긴장감은 바로 이 관계의 낙차에서 발생한다. 둘은 서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유일한 존재이고, 이런 구도는 멜로-로맨스 서사에서 즐겨 사용되는 클리셰이다. 그리고 이 클리셰를 통해 아수리언 팬덤은 ‘커플링’이라는 2차 창작의 재료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