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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Aug 25. 2020

불한당 (2)

사랑하는 남자들 - 보고 듣고 말하기 #24

영화 <불한당>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지닌 여성 인물인 천인숙 팀장 역시 남성 욕망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부하 요원들이 죽든, 위험한 상황에 빠지든, 몇 년을 기다려야 하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만들기 위해서 협박과 어르기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뿐만 아니다. 천 팀장은 상대가 몇 명이든 굴하지 않고 상황을 주도한다.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이들과 동석한 브리핑에서 천 팀장은 주저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오세안 무역을 찾아가 고병철 회장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거침없이 행동한다. 그는 상황이 자신에게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일은 하고 보는 성격이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그런데 경찰 간부인 천 팀장은 경찰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모욕을 받는다. 고병철 회장은 손가락을 캐비어 그릇에 집어넣어 캐비어를 퍼낸다. 그리고 천 팀장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까딱댄다.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천 팀장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거나 동일한 직급의 남성 경찰 간부가 왔어도 가능한 모습이었을지 의문이 든다. 극 중에서 천 팀장의 약점은 그가 바로 여성이라는 점이다.


천 팀장은 어찌하여 오세안 무역을 일망타진하는 데 집착하는 걸까. 아기자기하게 일해서 환갑 지나 본청 올라갈 것이냐고 직속상관을 다그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성이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조직 안에서 여성들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거나, 조직을 떠나거나. 천 팀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만으로는 천 팀장의 동기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어찌 보면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천 팀장은 현실의 호모소셜리티를 재현한 영화 속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성적 객체로 기능하여 성적 주체인 남성들의 영역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 팀장은 더욱이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치게 된다. 기실 천 팀장이 욕망하는 것은 그가 호모소셜리티가 욕망해야만 한다고 강제한 것에 불과하다. 


여성 인물에 대한 공백은 지나치게 쉬이 다뤄진다. 조현수의 어머니 캐릭터는 더욱 심각하다. 이름조차 없는 그는 현수가 잠입 임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짐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현수의 각성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왜 이름 없는 캐릭터로 머물러야만 하는가. 우리는 그의 서사가 왜 기억되지도, 호명되지도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바로 그 지점이 지금까지 한국 누아르의 한계였다. 그러나 이는 또한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차이나타운」은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차이나타운」은 서사구조 측면에서 딱히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우정-음모와 배신-죽음’이라는 정형화된 한국적 누아르 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은 한국적 누아르 서사 속 남녀 캐릭터의 전통적 구도를 뒤집었다.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조직은 모계를 따라 계승되고 주인공 일영은 ‘엄마’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조직을 이어받느냐, 사랑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선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잃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이 과정에서 남성 인물들은 여성 인물들을 추동하고, 배경이 되는 데 머무른다. 일영을 보며 환히 웃으며 파스타를 해주겠노라고 말하는 석현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어째서일까. 석현이 남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 인물이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동일한 표정을 지었다면 전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 테다.


「차이나타운」은 엄마와 일영 사이의 팽팽한 대립을 통해 폭력의 주체로서의 여성상을 제시하였다. 「차이나타운」은 여성 누아르의 서사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여성이 누아르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어쩌면 누아르 영화의 장르적 한계 때문에, 또 사회적 한계로 인해 고질적이고 습관적인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쉽사리 사라지기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영화 「차이나타운」이 증명했듯이 아무리 오래되고 반복되어 온 고루한 장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가능하며 또 유효하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퀴어 로맨스, 불한당     

<불한당>은 누아르 장르의 영화지만, 로맨스 장르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주요 인물들을 추동하는 힘 역시 로맨스 서사에 근거한다. ‘한재호-조현수-고병갑’의 관계는 로맨스 서사의 클리셰인 삼각관계를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퀴어 서사로 작동한다. 변성현 감독은 <불한당>에서 남성성이라는 허구의 대상을 갈망하는 누아르의 외피 아래에서, 퀴어 로맨스 서사를 가져와 남성적 세계의 해체를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불한당>은 멜로적 결말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불한당>에 배우 임시완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통상 한국적 누아르에서 미소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아르 영화는 미소년 이미지의 남성 배우가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겠다는 이유로 선택하고는 했던 영화였다. 「비열한 거리」의 주연을 맡은 배우 조인성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호모소셜리티의 세계인 누아르에 현존하는 한국 남성 배우 중 가장 미소년의 이미지에 가까운 임시완이 참여함으로써 후죠시(腐女子)들은 <불한당>을 재해석할 단초를 얻는다.


많은 이야기의 중심축에는 ‘만남과 헤어짐’이란 주제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로맨스 장르의 경우 만남과 헤어짐이 이야기 전부라고 할 정도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불한당> 역시 퀴어 로맨스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란 원형적 서사를 따르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와 끝 장면에서 동일한 스포츠카의 같은 자리에 누워있는 한재호와 조현수 모두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은 데에서 ‘만남과 헤어짐’의 서사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또한, 현수와 만나기를 기다리는 재호, 재호를 죽인 현수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멜로적 비극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능도 한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두 장면의 대비는 두 주인공을 형상화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맑은 날의 햇빛 아래,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 눈을 감고 있는 재호의 모습에는 파국이 도래하기 전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백일몽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현수와 함께한 나날들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현수는 어떠한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현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허공을 응시한다. 상처 가득한 얼굴과 구겨진 옷은 그가 받은 내면의 아픔을 훌륭하게 담아낸다. 푸른빛이 드리운 현수를 배경으로 영화는 끝난다. 현수와 재호는 갔다가 돌아왔고, 만났다가 헤어졌고, 그리하여 현수는 사랑이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정념에 괴로워할 도리밖에 없다. 영화의 끝을 다 말하기 전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봐야만 한다.      


<불한당>을 로망스의 맥락으로 해석해 봤을 때 영화 속 ‘만남과 헤어짐’의 플롯이 지니는 정형성과 기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로망스의 장르적 정형성 중 하나는 주인공이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 떠나는 편력의 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여러 사건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사건 발생에 따른 지연과 일탈,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통해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교도소 안은 지극히 로망스적인 공간이다. 재호와 현수가 교도소 안에서의 위협을 제거하고, 세상 밖으로의 ‘모험’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들 간의 사랑이 싹트고 그럼으로써 파국에 대한 복선이 깔리는 닫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로망스에서 기사가 모험을 떠났다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처음에 출발했던 ‘성’이다. <불한당>에서 재호와 현수의 성은 붉은 스포츠카다. 재호와 현수가 로망스적 공간인 교도소 밖에서 재회할 때, 본격적인 모험이 펼쳐진다. 그리고 재호는 붉은 스포츠카에 현수를 태우고 질주하며 모험의 시작을 알린다. 차 안은 오로지 둘만의 공간이다. 금발 미녀를 제외하고(그러나 금발 미녀가 현수에게 출소 선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는 단지 붉은 스포츠카의 배경일뿐이다) 붉은 스포츠카를 탄 인물은 오로지 현수와 재호뿐이다. 거사 직전 해변에서 폭죽놀이를 한 후 새벽을 맞이한 그들은 역시 스포츠카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모든 것을 정리한 재호가 현수를 찾아갈 때 타는 차도 붉은 스포츠카다. 현수가, 또 재호가 영화의 끝과 초반부에 누워있던 곳 역시 붉은 스포츠카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영화에서 붉은 스포츠카는 현수의 재호의 공간이기 이전에 재호가 지닌 욕망의 물화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영화에서 사용되는 빛과 연결된다. <불한당>에서 사용되는 빛, 혹은 색은 크게 나누어 노랑, 파랑 그리고 빨강이다. 노랑은 재호의 영역을 나타낸다. 교도소에서 재호가 현수의 방을 찾아가 둘이 처음으로 독대하는 장면, 최 사장의 사무실 밖 항구 장면, 폐허가 된 오세안 무역의 옛 사무실 장면에서 노란빛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빨강 또한 재호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빨강은 재호의 욕망을 드러낸다. 스포츠카와 러시아 마피아가 운영하는 클럽은 짙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특히 러시아 마피아와 함께 고 회장을 살해한 장면을 보면 이런 지점이 명확해진다. 총성과 섬광이 지나간 후 재호는 성냥불을 붙인다. 그와 동시에 노란빛이 그의 얼굴에 명암을 강하게 드리운다. 그리고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재호의 얼굴에 튄 핏자국이 뚜렷하게 보인다. 한국 누아르에서 즐겨 쓰는 로우키 조명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동시에 노랑과 빨강이 재호의 색임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면 파랑은 현수의 영역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천 팀장과 통화하는 현수의 배경으로 잡히는 교도소는 이전과 달리 노란빛은 사라지고 파란빛으로만 가득하다. 또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스포츠카에 누워있는 현수를 파란색으로 뒤덮음으로써 빛의 상징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특히 병갑을 죽이고 현수를 만나러 스포츠카를 타고 가는 재호의 얼굴을 비추는 조명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는 지점은 두 색이 각각 어떤 인물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현수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재호의 운명을 드러내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한재호는 ‘뒤통수치는 새끼 죽이고, 대드는 새끼 죽이고, 마음에 안 드는 새끼 죽이는’ 무자비한 인간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죄책감을 줄이려 총을 쓰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적대자를 살육한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인간이다. 손을 떠난 공은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벽에 부딪히고 되돌아온다. 공의 궤도를 예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재호는 여러 번 공을 던져봤고 늘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재호가 현수를 향해 던진 공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현수가 재호의 공을 쳐서, 고 회장 사무실의 유리창을 깨뜨린 것처럼 말이다. 재호는 현수를 향해 공을 던질 때 그가 사랑에 빠질 것이란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현수를 ‘감으려’던 재호가 오히려 현수에게 감기고 만 것이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자신이 경찰이라는 현수의 고백을 들은 재호의 표정을 보자. 자기 뜻대로 현수가 ‘감겼다’라는 희열이라기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 일그러져 있다. 차라리 그의 표정에 당혹, 죄책감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수가 고백하기 전, 재호가 한 말을 되짚어야만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고백 말이다.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와의 거래 직전 재호는 현수에게 말한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뒤통수에서 오거든. 그러니까 너도 자주 뒤돌아보면서 살아.”     


늘 자신의 뒤를 의심하며 살아온 재호는 현수의 고백으로 난생처음으로 뒤통수가 아닌 정면에서 도래하는 파국을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사랑은 정념에 휩싸인 이를 감아 파멸로 인도한다. 그러나 재호와 현수의 세계에서 사랑은 얼마나 쓸모없는가. 본디 사랑은 무용하다. 계략에 의해 서로 목을 노리는 그들의 세계에서 사랑은 지독히도 무용하다. 그러나 현수와 재호는, 사랑한다.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잘 골라잡아야만 살아남는 세계에서 서로를 사랑한다. 어쩌면 무용한 것만이 그들의 영혼을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용한 것만이 유용한 것이 그간 그들을 얼마나 억압해 왔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욕망은 불안과 결여를 먹고 자란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필히 의심을 동반한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현수와 달리 재호는 끔찍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채 현수를 사랑한다. 사람을 믿지 않기에 상황을 조성하여 현수를 감아버린다. 이 때문에 현수는 끊임없이 현수를 의심한다. 러시아 마피아의 사무실을 처음으로 방문하면서 둘은 엘리베이터를 두 번 탄다. 처음 탈 때 현수는 재호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준다. 그러나 두 번째 탈 때 재호는 현수의 몸을 강압적으로 수색한다. 이처럼 끝끝내 상대를 속여야만 지속 가능한 사랑은 깊어질수록 더더욱 잔혹한 끝을 예고하기 마련이다.


재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상황이 현수를 의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음에도 현수에게 간다. 현수를 위해 절친한 친구인 병갑마저 제 손으로 죽인다. 자신은 곧 현수의 손에 의해 파멸을 맞이할 테니, 홀로 남을 현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영근 같은 부하에게 병갑을 죽이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재호는 책상 서랍에 총이 있지만 구태여 병갑의 머리를 자신의 명패로 내리쳐 직접 살해한다. 재호의 삶처럼 명패는 피범벅이 된다. 지난 삶을 기억하는 이를 죽이면서 재호는 삶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한다. 

병갑을 죽이는 재호의 모습은 현수의 모습과 겹쳐진다. 현수는 천 팀장과 민철은 총으로 죽이지만 재호만큼은 두 손으로 직접 죽인다. 재호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똑똑히 확인하다. 둘은 죄책감에서 회피하지 않는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저질러야만 하는 일을 한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재호가 철창 안의 ‘지저스(Jesus)’라고 소개되는 장면에서 그의 곁에 나란히 앉은 부하들은 단 열두 명뿐이다. 재호에게 현수로 열세 번째 제자인 셈이다. 그리하여 현수는 최후의 순간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이자, 예수를 부정한 베드로가 된다. 현수는 재호를 죽이고자 자신의 사랑을 부정한다. 재호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현수의 모습은 그들의 사랑이 채 끝나지 않았고, 지금 막 끝나려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베드로가 하룻밤 동안 동이 트기 전까지, 예수를 세 번 부정하고 살아남았듯이 현수는 사랑을 부정하고 삶을 택한다. 그리하여 동틀 무렵 세상이 시퍼렇게 물들어갈 때 그의 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그는 막 모험을 마치고 돌아왔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머나먼 곳으로 떠나라 유혹하고, 그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에게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고, 우리를 다녀오지 못한 또 다른 곳으로 떠민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여정이 시작되는 고통과 좌절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자신이 떠나보낸 것이 부정한 것이 무엇이었음을 깨달은 자는 사랑의 불시착을 온몸으로 겪는다. 찰나를 밝힌 성냥개비처럼, 빛이 환할수록 상흔은 더욱 짙게 남는다. 그렇게 사랑의 파국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남은 생을 버틸 슬픔을 얻는다.           


불한당, 이후     

누아르 영화는 2000년 이후 꾸준하게 제작되어왔고, 한국적 누아르의 형질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성 혐오적 요소 역시 꾸준히 반복되어왔다. <불한당>은 퀴어 로맨스 서사와 누아르를 과감하게 접목함으로써 한국 누아르 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불한당> 역시 한국적 누아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우리는 <불한당>을 보며 조금 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현수는 왜 ‘딸래미 같다’라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가. 또 왜 현수의 출소 선물이 금발 미녀야 하는가. 도대체 여성 인물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을 품어야만 한다.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해보자면, 어째서 누아르의 세계에서 여성성은 모욕적으로 사용되는가? 답은 명확하다. 그러니 이 질문이 <불한당> 이후의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고민이 되기를 희망한다. 


현수 어머니가 이름을 되찾고 천 팀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지닐 수 있을 때, 한국 누아르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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