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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3.02.28)

덩그렇다

퇴근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공학관 1층 로비에 섰다. 한동안 코로나 출입 단속을 하겠다고 차려둔 책걸상들이 한쪽 벽면에 붙어있었다. 거진 3년을 붙어있던 책걸상이 사라지니 문득 덩그렇다. 새벽의 신공학관 로비는 쓸쓸하기만 한데, 한쪽 구석에서 몇 번이고 재생되는 늙은 공학자의 영상이 쓸쓸함을 더한다. 혼자 멍하니 로비에 서있으니 이제는 내가 홀로 덩그렇다. 이 새벽의 나를 두고 덩그러움이 교차한다. 내 마음도 덩달아 덩그렇고, 그 마음자리에 덩그렇게 남은 것은 내 굳이 헤아리지는 않겠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안암골을 떠나고 나 혼자 덩그렇다. 나름의 성취를 품고 떠나는 이들인데, 마냥 축하할 기분이 아니라서 미안할 따름이다. 이제 새로 입학하는 이들과는 확실히 느껴지는 거리감이 있다. 나는 그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고 많은 걸 쏟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도 알지 못했으나,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다는 호연지기가 있었다. 또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냥 떠나고 싶다. 탁 트인 곳으로 가고 싶다. 지겨움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


아침에는 난생처음 받아본 건강 검진 결과를 들으러 번지르한 병원에 가야 한다. 보름쯤 전에 “교우 할인받으실 수 있으세요.” 같은 부끄러운 말을 들으면서, 사십 팔만 칠천 원을 내고 건강검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병은 내가 잘 알지. 내시경이 똑똑히 보았다는 위의 조그만 종기만큼이나 나도 내 덩그러운 마음자리를 똑똑히 보았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라면 후자는 전이가 된다는 것이다. 의욕을 꺾고, 의지를 꺾는다. 지겨움이 온몸 구석구석 퍼져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을 때 나는 아마도 완전한 생활인이 되겠지. 그전까지 곱게 죽진 않겠다고, 또 다짐했다.


몇 년을 낙타처럼 걸었더니, 이제는 그냥 풀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다. 나를 표현할 적절한 수식어는 vulnerable이라고 하던데, 절반의 사실이다. 요즘의 나는 fragile에 더 가깝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깨질 때 깨지더라도 피를 보겠다는 마음이 한 줄 더 있다. 학구열 대신 독이 바짝 올랐다. 이제 이 나날들도 절반을 걸었으니 무엇을 배웠는지 셈해볼까. 학풍이랄 것 없는 천박한 전공인데, 기술도 글도 별로 늘지 않았다. 내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단과 방법을 배우는 것인 줄 알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에 대해 배운다. 사람이 다시 싫어지는 시절이라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싫다.


도무지 이러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휴가를 가겠다고 했다. 다음 달 중순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어디로든 떠나버려야지. 돈을 펑펑 쓰고 술을 잔뜩 마시고 영수증을 부여잡고 일어서야지. 내달리는 삶의 지겨움을 따돌리기는 늦었다. 목덜미를 붙잡고 노려보는 그놈에게 몇 푼 쥐어주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 아닐까. 요즘 자려고 눕거들랑 이런 생각만 덩그러니 굴러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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