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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23.06.19)

복통

미루고 미루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나가는 것 같은 여름날이었다. 광폭한 더위에 밥을 먹으러 나서는 것도 힘들었다. 안암엔 더 이상 합리적인 가격의 수박주스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늘 그렇듯 강된장 열무덮밥을 먹겠다고 오성식당으로 갔다. 여름도 찾아온 손님일진대 박대하는 것은 군자의 덕목이 아니겠으나, 또래 중 으뜸가는 소인배인 나는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심정이다. 계절을 맞을 준비는 나름 착실히 하고 있었다. 여름옷을 몇 벌 사고, 냉장고에는 닥터페퍼와 17차를 채워두었다. 주문을 잘못한 탓에 닥터페퍼는 제로가 아닌 일반 닥터페퍼가 왔다. 가끔 한 캔 정도는 괜찮겠지, 스스로를 속여본다. 비빔면을 한 봉다리 샀고, 만두 한 봉다리와 같이 메론도 한 통 샀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지난주쯤 깨달았다. 평소 연락도 잘 되지 않던 친구 하나가 안암에 와서 밤늦게 술을 몇 잔 마셨다. 이미 취한 녀석들에 장단 맞추기가 버거워 몇 잔 마시지 않고 귀가했으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퍽 반가웠다. 돌아서니 문득 언제 또 보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돌아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제 나는 아마 인생에서도 여름을 지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봄은 끝났고, 이젠 전보다 많은 것들이 귀찮다고 느낀다. 호의도 악의도 이제는 다 그냥 먼발치에 두고 힐끔거린다. 마냥 아프다 아프다 중얼거리기엔 나잇값이 무섭다. 최대 3개월 무이자 할부라던데, 나는 이미 다 끌어다 썼다는 걸 잘 안다.


요즘 부쩍 건강이 신경 쓰인다. 먹는 것도 나름대로 조절하고 있고, 선크림에 스킨로션을 찾기 시작했으며, 운동도 가급적 꾸준히 하려고 한다. 오늘 운동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풋크림까지 발라가며 17차를 마셨다. 차가운 17차를 벌컥이다가, 문득 배가 아픈 것도 같아서 흠칫했다. 언젠가 냉동 고기를 잘못 먹고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 그때 살던 집은 에어컨도 없는 반지하였는데, 나는 토사곽란에 거의 죽어가다가 간신히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여름이 마냥 두렵다. 혼자 가야 할 응급실을 떠올리면 마냥 구슬퍼진다. 어쩌면 그날의 복통은 영영 내게 남을 어떤 여름의 상흔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이제 여름만 되면 그놈에게 당한 상처가 쑤시듯이 복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이 재수 없는 계절을 얼른 벗어나야겠다. 소금을 뿌리고 얼른 가을로 가자, 겨울로 가자. 강된장 열무덮밥 넘어 꼬막비빔밥으로 가자.


복통이 점점 실체를 찾아가 배를 쿡쿡 찌를 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7차를 검색했다. 나무위키는 17차가 아사히의 16차라는 제품을 카피했으며, 율무가 들어있으니 평소에도 몸이 찬 사람들에겐 복통을 유발하기 좋다고 설명하였다. 그러고 보니 몇 번 배가 아플 때마다 17차를 들이켰던 것이 생각이 났다. 17000원에 24병이라 좋다고 샀던 이 녀석들은 이제 21병이 남았고, 그동안 배는 2번 아팠으며 이제 막 세 번째 복통이 시작되는 중이다. 냉장고에 불청객이 천지로구나. 계절의 상흔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다. 내 인생은 개그만화와 소년만화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가장 추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배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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