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 다르고 삶 다르다
외래종 길고양이를 제외하면 한반도의 고양잇과 동물은 아무르표범, 스라소니, 시베리아호랑이 그리고 삵뿐이라 한다. 이제는 한반도 지역에서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된 녀석들이지만, 한때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고양잇과 동물들이었다. 그중 삵은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 살았다고 하고, 최근까지도 농촌에서는 쥐를 잡거나 하는 이유로 대충 부대껴 살았다고도 하니 한국인 삶의 반경에서 멀어진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삵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길냥이들인데, 보다 체구도 작아 도시의 구석자리를 내어받을 수 있었고 필요한 열량도 작아서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몸뚱이가 커서 도시 속에 살아가지 못하고 길고양이에게 제 자리를 내어준 삵이 동물원에서는 철망사이에 끼어 놀고 있다 하니 어딘가 애잔도 하다.
삵 다르고 삶 다르며 철 다르고 절 다르나, 삶 역시도 절망 사이에 끼어 논다. 비대한 자아는 도시 속에서 도움이 되지 않고, 여기저기 사람에 부대끼느라 삶은 때로 절망에 끼어 놀고 한다. 이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삶이 희망에 몸을 끼워 놀아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 씨발 지랄 염병 개지랄 같은 것들만 나와 부대끼는가? 요즘 자주 울컥하는 마음이 솟는데, 그럴 때면 일단 주변의 날카로운 것들을 멀리 치워놓는다. 그래도 그제는 너무 힘들어서 대낮부터 소주를 한 병 마셨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삶은 절망에 끼어 노느라 바쁜 것 같으니 나라도 한 잔 사줘야 하지 않겠나, 아직은 화를 다스리는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저녁에는 간만에 옛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 하나는 내년에 결혼하는데 날짜가 518이라며 재밌어했고, 친구 하나는 레미제라블의 테리우스가 보나파르트주의자라며 재밌어했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 같아 재밌어했다. 생활인도 룸펜도 뭣도 아니다. 학생도 엔지니어도 뭣도 아니다. 성인군자는 절대 아니며 그렇다고 마냥 무뢰한도 아닌 것 같다. 그래 언젠가는 다 끝날 것이다. 일단은 자리에 붙어서 이 개지랄 같은 여름이 끝나길 바라자. 길고 재미없는, 하지만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영화를 보는 중이라고 치자. ‘비대한 자아를 보다 탄탄하게 가꿔 절망 사이에 끼어 노는 시간을 좀 줄여보자.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아니 근데 씨발 천 번 흔들리기 전에 steady-state가 될 수 있도록 감쇠비를 늘리는 방법은 없나? 하하, 석박통합 4년 차가 되었더니 울컥하면서도 엔지니어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사실, 삵이 도시에서 모습을 감춘 주요한 이유가 비대한 몸집은 아니다. 인간들이 너무 강한 쥐약을 마구잡이로 뿌려댔고, 그게 쥐를 먹고사는 삵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삵은 쥐약을 구분할 수 없었겠지만, 내게는 쥐약을 쥐약이라 말해 줄 사람들이 남았다. 그래 어차피 범이 되지 못할 팔자라지만, 아무거나 냅다 주워 먹지는 않겠다. 길고양이로 쪼그라들어도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갈 테다. 그러니까 깊고 슬픈 바다 네 이놈! 홀로 떠나가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겠다. 오늘은 다행히 코드의 에러가 좀 잡혔다. 이 씨발놈들아! 정체가 분명한 하지만 그래서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욕을 한 번 하면서 퇴근을 했다. 비는 조금 잦아들었고, 태풍은 이제 사그라들 모양이다. 안심해도 되려나, 삶은 절망사이에 끼어서 노는 습성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