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네 친구 이야기’를 보고
내내 숙취로 괴로워하던 중에 은사님이 준비하신다는 연극을 보러 혜화에 갔다. 공연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도착한 소극장은 낙산공원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자주 가던 파스타집이 있었는데, 이런 곳에 소극장이 있었구나 싶어 혼자 웃었다. 자리를 안내받으며 ‘네 친구 이야기’라는 제목 달린 팜플렛을 받아 들고, 음악 및 지도교사 항목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은사님이 설명할 적에는 ‘전체 총괄 음악 연출 등등’이라고 언급하셨는데 다른 이름들이 나열된 것을 보고, 은사님의 허풍과 겸양 중에 어떤 것을 택할지 잠시 고민했다. 사실 큰 기대를 하고 연극을 보러 온 것은 아니었다. 팜플렛을 마저 읽으며 학생들이 준비한 재기 발랄한 소동극 정도를 상상해 봤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뒤적거리는 동안 막이 올랐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철수’라는 남학생이 마주하고 있는 친구관계의 위기를 다룬다. ‘철수’ 본인의 친구 이야기기도 하고, 그의 가족들이 마주하고 있는 친구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위기라고 적은 것은, 이야기 면면이 마냥 밝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수’ 본인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좌절하고 있다. 나머지 가족들의 친구관계도 순탄하지는 않다. ‘철수 아빠’가 마주하고 있는 친구사이의 금전적 채무관계, ‘철수 엄마’가 고백하는 친구사이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시샘, ‘철수’의 동생인 ‘영희’가 겪고 있는 유행과 우정이 그렇다. 극의 끝에서 ‘철수’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되짚으며 친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토로한다. ‘친구란 힘이 되는 존재일까, 짐이 되는 존재일까?’
철수의 물음에 대한 마땅한 답을 고민하는 사이에,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각자 결핍을 지닌 세 친구이다. 극이 이들의 결핍을 드러내는 방식은 흔히 뒷담화라고 하는 서로에 대한 흉을 보는 것이다. 셋 중 하나라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이 시작되고, 당사자가 돌아오면 가식을 떨기 바쁘다. 모두가 다시 자리에 돌아오자 멤버들 사이의 불화로 해체한다는 아이돌 그룹의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돌 그룹을 반면교사 삼아 우정을 다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첫 번째 이야기의 ‘철수’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이입할 무렵, 세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반자본주의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공찬’과 대형 로펌 변호사로 주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오고 있는 ‘동준’의 이야기이다. 이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끝에, 은행나무 아래에 멈춰 선다. 이젠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그들은 여전히 친구였음을 기억해 낸다. 그 끝에 내리는 그들은 비를 피할 수 없다면 함께 맞기로 한다. 뜻을 함께 해야 동지(同志)라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 서서 함께 비를 맞는다면 동지(同地)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이야기는 친구 이야기의 단골손님이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문답을 역학에 비유한다면, 이미 고전을 넘어 양자의 영역으로 들어간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도 그 파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있지 않다. 우정보다 상대에 대한 애정이 앞서 더 이상 친구하지 못하겠다는 남자와, 애정관계는 오히려 파국을 가져온다며 영원히 친구로 남기를 바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다만, 이 파장에 균열을 내며 웃음을 가져오는 것은 Amicizia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직원들이다. 의미심장한 레스토랑의 이름(Amicizia는 이탈리어로 우정 또는 육체적 관계를 의미한다.)을 뒤로하고, 잔잔한 웃음과 함께 극이 막을 내렸다. 밀려드는 문답들을 잠시 치워두고, 나는 다른 모든 관객들처럼 열심히 박수를 쳤다. 은사님과 악수를 하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가을 밤 공기가 찬데, 얼얼한 손바닥은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성실한 관객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친구라는 것을 규정할 수 있어 ‘친구임’과 ‘친구 아님’을 나눌 수 있을까? 어떤 온건한 낱말을 가져와도 그것은 마치 ‘적의 적은 친구’와 같은 하드보일드한 세계로 보인다. 그런 세계를 거부하려거든 규정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것도 마땅치 않다. 아무래도 친구를 규정하기 어려운 까닭은 인생이 어려운 이유와도 닮았다. 친구란 이 삶의 오솔길에서 어쩌다 보니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된 이들인가? 걷다 보니 삶의 속도가 달라서 자연스레 멀어질지도 모른다. 그들 중 누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나와는 다른 방향을 택하기도 한다. 어쩌면 친구란 내 삶에 대한 내 삶 바깥의 준거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본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결말에서 주인공 마히토는 이세계를 뒤로 하고 불안한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친구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그대들 어떤 친구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친구를 만들 것인가? 이제야 서른 초입에 선 나는 많은 친구를 만났고, 또 비슷한 수만큼의 친구를 잃었다. 요즘 내 화두라 하면 늙어 죽을 땐 친구가 몇 명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고 불안한 삶을 껴안으려는 노력은 그만둘 생각이 없으니, 나는 어디선가 또 친구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때때로 그것이 대세에 어긋나고 남들이 미쳤다 손가락질하더라도, 나는 이 오솔길을 함께 걷는 불안한 이들과 친구할 수밖에 없다. 미친 짓도 같이 하면 안 미친 것처럼 보인다던, 은행나무 아래에서 두 친구의 작위적인 문답이 참으로 소중하다. 내 모든 친구들의 안녕을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P.S. 가벼이 적은 글이나 제법 길게 되었으니, 은사님이자 나이 많고 건설적인 친구에게 조만간 술을 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