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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3.12.21)

겨울


어제는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아닌가, 그저께였나. 잘 모르겠다. 요즘은 요일 감각이 흐릿하다. 아침에 운동 갈 적에는 오지 않았던 것도 같다. 운동 다녀와 더 자다가 출근한 이후에는 계속 눈이 내렸다. 하루 종일 코드와 쌈박질을 했다. 나는 전지전능한 chat GPT에게 동료 되기를 청하였으나, 이 녀석이 때때로 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진이 다 빠졌다. 이번 달에 열심히 논문을 끝내고 어디론가 떠나리라 벼르고 있다. 튀르키예도 좋겠지만, 자꾸 나는 삿포로에 마음이 간다. 영영 녹지 않을 것 같은 설원을 눈에 담고, 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얼굴 가득 머금은 채로 어느 술집에 들어가 따뜻한 사케를 마시고 싶다. 잔뜩 취해서 나오는 밤거리에 나는 다시 바람을 맞으며 설원에 대고, “천박한 원숭이 놈, 북풍을 향해 부는 북풍도 있는가?” 물어볼 것이다.


북해도의 설렘을 다 펼쳐 보이기엔 당장의 과업이 무겁다. 새벽에 간신히 집에 들어와 보니 쓰레기장도 이런 쓰레기장이 또 없다. 잠시 플라스틱을 모아서 집밖으로 내어두고 담배를 태웠다. 멈추지 않는 눈에 발이 시리다고 느낄 때쯤, 골목 화단에 기대 누운 여자를 봤다. 너무 무서워 소중한 돗대를 떨어뜨렸다. 천천히 다가가서 “저기요,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하고 흔들어 깨웠다. 갑자기 눈을 뜬 이가 “감사합니다” 하고 골목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하며 담배를 주워 눈을 털어내고 다시 태웠다. 알고 보니 내 방 바로 옆 건물에 사는 이였는데, 그를 깨운 책임감에 그의 귀가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공동현관문이 열리고 방금 들어간 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감상에 빠졌다가 마저 담배를 태웠다.


자고 일어나서 출근을 하는데, 어제 그 슬픈 취객이 머물러 있던 자리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다. 아마 취객이 집에 들어간 이후에 눈도 멈췄던 것이겠지. 새 담배를 사고 간밤의 눈이 술자리의 얼룩진 기억마냥 드문드문 남아 있는 거리에서 다시 담배를 태웠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설경이 흉하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 눈이 얼른 다 녹았으면 좋겠다. 볼 수 없는 것은 이제 없는 것이니, 눈도 이 계절도 다른 무엇도 원래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오늘은 코드와의 쌈박질에서 내가 이겼다. 간단한 0-1 Knapsack Problem이었는데, 시간을 너무 오래 뺏겼다. 0 아니면 1, 그것은 설경에 대한 내 마음 같은 것이다. 눈 한 움큼에 시려지는 내 마음이 maxweight이고, 거기에 들러붙는 좋은 기억 한 조각이 value가 되시겠다. maxweight를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value를 최대화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가 좀 엉망이지만, 어차피 이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지 않으니 괜찮다. 내일부터는 보다 속도를 내야 한다. 일찍 집에 들어와서 집을 마저 치웠다. 세탁기가 털털거리고, 간만에 태우는 향 냄새에 편안함을 느낀다. 약을 먹었고, 기상 알람을 맞췄다. 자기 전 마지막 담배를 태우는데, 저 멀리 보이는 건물 하나가 시린 달빛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하루 같은 이틀 끝에 바라본 겨울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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