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과정_많이 솔직한 버전
요즘에도 성장 과정을 묻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직접적으로 성장 과정을 묻지는 않아도, 분명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성장 과정을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작성해 본 성장과정이다.
엄청 솔직하기 때문에 취준생들의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이니, 진지한 성장과정 모범 답안을 찾으신 분이라면 살포시 뒤로 가기를 추천드린다.
재미로 보실 분들만 읽어주시길 :)
나는 첫째 딸이다. 우리나라에는 첫째 딸에게만 붙여주는 귀엽고 대의명분으로 그득해 보이는 별명이 있는데 그건 바로 K-장녀다. 대충 책임감이 강하고, 살림도 잘하고, 감정이 있어도 꾹 누르고 잘 참으며, 성실하고 부지런히 집안일을 눈치껏 잘 해결해 나간다는 이미지를 얘기하는 듯하다.
그런 이미지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나는 평범한 가정의 첫째 딸이지만 K-장녀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고 싶었던 그냥 개딸내미였다. 다만 자수성가한 아버지께서 조금 엄하시고 본인만의 기준이 빡세서 뭘 하나 하려면 그 과정에서 좀 큰소리가 났을 뿐이지.
눈치? 그런 건 쥐뿔도 없다. 아니면 아닌 거고,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부딪혀버리고 마는 나였다. 돌려서 돌려서 어떻게든 하고 싶은 것을 해 내는 잔머리 좋은 애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온몸으로 부딪히고 부서지는 아이였다. 그렇게 무섭고 엄한 아빠가 하는 말도 듣다가 말이 안 된다 싶으면 왜 아까랑 말이 다르고, 어제랑 말이 다르냐고 따져 대는 무서운 놈이었다. 그래서 결국 대성통곡으로 끝나고 못한 적도 많다. 그게 아무래도 그런 일들은 기억에 크게 남으니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산 것 같다는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이지 않나.. 생각한다.
오히려 눈치는 내 동생이 다 보고 살았지..(미안하다 야..)
그래도 꼭 하고 싶은 것은 서면으로 해결하며 살았다. 도저히 대면으로 상대가 안 되니, 편지를 적거나 문서를 적었다. 결국 그때부터 나는 제안서를 쓰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 안 된 적이 거의 없다. 이로써 난 진정한 비대면 전문가(a.k.a 키보드 워리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달리 맷집도 강하다. 얼마나 많이 부딪히며 살았겠는가. 그것도 아빠랑. 그건 아빠가 만만하고 안 무서워서 부딪혔던 게 아니다. 아빠의 주장과 반대 근거를 납득할 수 없으니 그걸 꺾어보려고 했던 거지..
나의 강한 맷집은, 실패하는 것을 그다지 큰 일로 생각하지 않는 성격과도 연관이 있다.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이 늘 있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을 처음 할 때, 생각도 많이 하고 계획도 (나름) 잘 세우느라 시동이 더디 걸리는 것이 문제 기는 하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지레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만약 안될 것을 대비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두기도 하지만, 생각해 본 적 없는 당황스러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자리에서 크게 당황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될 일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하면 된다.
책임감이 강한 건 맞다. 근데 사실, 본인이 책임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다 제각각의 책임감을 갖고 사니까. 나는 여기까지가 내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정의 내려버리면 거기에다 따져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거다. 더러워서 안 따지든, 진짜 할 말이 없어서 못 따지는 것이든 말이다. 그래서 백 날 내가 책임감 강한 사람이라고 떠들어 봤자, 그건 내가 무책임한 행동을 했을 때 저 사람은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이라거나, 메타인지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증명시켜 주는 족쇄가 될 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러니 취준생 여러분들은 책임감 강하다는 것을 본인을 대표하는 기질로 어필하려거든, 굉장한 성장배경과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이상 '성장과정'의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