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품: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처음 면접을 보러 갔을 때, 한 면접관이 나에게만 유독 이런 질문을 했다.
"존경하는 인물이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오.. 예상 문제가 적중했기에 신나게 생각해 둔 답안을 읊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떨어지기는 했는데, 나는 그때 우당 이회영 선생을 존경한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본 역사 속의 인물 중 가장 용감했던 멋진 아저씨였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건 그저 내가 동경하는 인물의 모습이었던 것이지, 내가 그를 진정 닮아보기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대답은 아마도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고, 이런 질문을 받을 것 같아서 준비를 해두긴 했습니다!"로 들렸을 게 뻔하다.
즉, 원인과 결과가 반대로 된 대답이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인물을 물어본다는 것은, 평소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 생각을 설명하기에 좋은 비유를 할 인물로서 누가 있는지 예시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원인이 됐든 결과가 됐든 20대 후반의 취준 청년에게 생활신조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을 확률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아, 물론 나는 예외다. 그런 걸 생각할 틈이 많았다(그럼에도 오답을 당당히 이야기한 건에 대해서는 준비가 덜 되었을 것이라는 변명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남들은 열심히 학점을 챙길 때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해외 봉사를 해야 한다고 아프리카와 필리핀, 라오스 등지를 오갈 때 난 그저 국내 여기저기를 놀러, 쏘다니며 사색에 잠길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기들이 방학 중에 인턴을 하고, 실험실에서 교수님의 연구를 도울 때에도 나는 홍대 어딘가의 카페에 콕 박혀 해맑게 라테 아트를 연습하고, 케이크를 만들고 설거지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알바를 구할 때 가끔 사장님들은 내가 유럽여행을 가거나,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잠깐 알바를 하는 것인지를 물었는데 아니올시다. 난 그냥 예쁜 카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커피를 배우고 싶었다, 그것도 돈 받고 할 수 있다니까.
“왜 때문에..?” 내가 스무 살이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었다.
솔직히 스스로도 나 자신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부를 해서 그토록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막상 오니 이것도 저것도 다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에.. 고등학생 때처럼 뭐라도 열심히 할 동인을 내 마음속에서 찾지 못했다. 막연히 공과대학을 졸업하면 어디든 취직은 되겠지,라는 생각뿐- 왜 내가 반도체 회사를 가고 싶은지, 화장품 회사를 가고 싶은지, 도대체 왜 화학공학과의 꽃은 정유 회사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었고 지금도 “내가 왜 때문에..?”라는 의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렇게 얻은 나의 생활신조가 대단할 거라고 밑밥을 까는 것 같지만 별 거 없다. "아닐 수도 있다(a.k.a 아님 말고)" 다.
내 20대 전체의 삶이 그랬다. 뭔가 될 것 같아서 해보면 아닌 때가 많았다.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것이 99%였다. 내가 세상을 잘 몰랐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게 늘 내 기대와는 다르게 굴러가는 듯했다.
2년 동안 취직을 시도해 보면서 난 그게 무엇이든, 뭐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생각도, 타인의 생각도- 다 아닐 수 있다고. 그래서 내 선택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학교 1학년 컴퓨터 전공은 아닌 것 같아서 자퇴했다. 반수로 다시 시작한 새로운 전공도 아닌 것 같아서 얼른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바꾼 전공은? 또 아닌 것 같아서 그 길로 취직하고자 하는 생각은 관두었다. 그렇다고 내 결정과 선택들이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 돌아가게 되어 시간과 돈이 아깝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런 비유가 맞을지 모르겠는데 이혼보단 파혼이 낫지 않은가...?(아님 말고..)
그 결과로 나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기대라는 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뭐라도 시작할 때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굳이 그것을 얼른 제자리로 돌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다른 생각해 둔 플랜 B, C를 꺼내두고 잠시 고민한다. 사안에 따라 원래 가야 할 트랙으로 돌아가야만 할 때도 있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삶이 내게 주는 스포일 지어다.
조선 최고 명문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이 모든 한국인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단연코 국가를 위해 전 재산과 목숨을 내놓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것이다. 우당 선생이 생각했을 때, 경술국치의 상황에서 한창 잘 나가는 일본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승산이 보이는 일이었을까? 배울 만큼 배우셨던 분이 무작정 용감한 태도로 맞서려고만 하셨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되는 것에 가까이 가보자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내가 우당 선생만큼 대의명분을 위해 움직일 수는 없어도, 가끔 내게 버거워 보이는 일들을 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본다면 그의 사상을 내 삶에 조금이나마 적용해 보는 사례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실제로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한다. 오버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하기에 버거울 것 같은 일이 주어질 때, 일단 멈추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되게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런 방법 중 하나로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최대한 그 사람을 활용해 보려고 노력해보는 것이 있다. 그러다 보면 직장 내에서 불편한 사람이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선입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렇게 남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도 가끔은 진정한 호기심이라는 것이 생기게 될 때도 있다. '저 사람은 어떤 것을 잘하는 사람일까?' 같은 것들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나의 답안이 정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언젠간 정답이 되어있을 순간이 온다. 나의 첫 면접 때 내지른 당당한 오답에다가 이제와서 이런저런 나의 사상을 갖다 붙이니 정답같이 보이지 않는가? 아님 말고~:-)
*표지 설명: 유유자적한 나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윤슬 사진을 유유자적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