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oPoooong
Feb 11. 2022
1
모처럼 휴가, 도서관에 들렀다. 종일 읽기와 쓰기 욕심이다. 도서관 풍경. 고요 정숙 대신 잔잔한 음악과 커피 향 은은한, 곳곳에 아담한 ‘자기만의 방’이 마련되었다. 공부에 여념 없는 청춘들이 많다. 시집 읽는 내 형편이 못내 사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니,
도서관 이름을 ‘꽃심’으로 이름한 것, 나에겐 전주시민으로서 자부심과 뿌듯함이었다. 참 예쁜 이름, 소박하되 뚝심이 느껴지는 ‘밥심’이 연상되곤 했다. ‘꽃심’의 국어사전 설명은 전라북도 방언으로 “꽃의 가운데 부분. 또는 ‘꽃과 같이 귀품이 있는 힘이나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는 풀이와 함께 예문으로 최명희 <혼불> 한 대목을 소개한다. 이어 발견한 자료, 혼불문학관 누리집에 실린 전주대학교 김승종 교수의 글이 ‘꽃심’의 이해를 돕기에 적절해 보였다. 전주시청 누리집에 소개한 전주정신 ‘꽃심’도 같은 맥락이다.
— ‘꽃심’은 <혼불>의 주제를 담고 있는 단어로서 “시련과 역경을 끝내 극복하는 힘”을 말한다. 또한 ‘꽃심’은 약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존중하는 ‘대동정신’, 멋을 즐기고 삶의 질을 중시하는 ‘풍류정신’, ‘공동체의 유익과 정의 실현을 우선시하는 올곧음 정신’, ‘옛것을 물려받아 새롭게 창조하는 창신정신’ 등을 모두 지니고 있다.
공부 탓일까, 시절 탓일까, ‘대동(大同)’의 큰 뜻 앞에 멈췄다. 약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존중하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의 안온하고 온전한 고을 전주(全州)의 상징으로 맞춤하다. 함께 풍류(風流), 정의(正義), 창신(創新)의 깊고 너른 정신을 전주정신으로 삼는다니 격조 있는 기품이다. 스물 중반에 읽었던 최명희 <혼불>에 이런 정신이 깃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는 게 꼭 부끄럽지만은 않다.
2
천양희 시인의 <지독히 다행한> 시집을 읽다가 ‘사소한 한마디’ 시편의 책 귀퉁이를 접었다. 인간 본연의 마음자리는 어떤 색깔일까, 신이 인간을 조물로 드러낼 때 어떤 모습을 당신 닮은 형상으로 그렸을까, 종교에 앞서 모든 이의 같은 마음이 있다면 무엇일까, 난데없는 깊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그 시편에 등장하는 ‘맹인’의 존재를 다시 묻게 되었다. 그를 통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 나만의 이기가 아닐런가. 접은 귀퉁이를 다시 폈다. 시집 마지막에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산문이 한 편 실렸다. 다시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맹인입니다’에서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로 고쳐 쓴 것을 보며, 시인의 물음이 삶에 대한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옮기면,
— 1920년 뉴욕의 추운 겨울,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라고 쓴 팻말을 앞에 놓고 공원 앞길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몇 사람만 적선할 뿐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남자가 시각장애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 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각장애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생각을 바꾼 것일까? 팻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글귀를 바꿔놓은 사람은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분명 이 사건의 중심은 시각장애인이다. 다른 사람의 동정이나 연민을 기대한 ‘구걸’의 행위자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구걸’ 상황에 두 사람만을 등장시키려고 한다. 한 사람은 시인이고, 한 사람은 적선을 한 행인이다. 시인은 그를 본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은 곧장 ‘행위’로 이어졌다. 시인의 행위는 행인에게 어떤 ‘마음’을 들게 하였다. 행인 역시 곧장 ‘행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의 ‘마음’과 ‘행위’에서 우린 어떤 물음이 필요한가.
(이제부턴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이다.)
(시인은 ‘언어의 힘’으로 사건을 해석했다. 사람을 적선으로 이어지게 한 힘, 마음을 움직이게 한 힘, 언어가 지닌 어떤 힘.)
(2022.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