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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oooong Feb 08. 2022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나와, 엄마와, 엄마의 엄마 -할머니와, 엄마의 엄마의 엄마 -증조할머니,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고조할머니.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여성들의 이야기. 증조모 삼천 이정선, 할머니 영옥, 엄마 길미선, 나 이지연. 새비 아줌마와 딸 김희자, 명숙 할머니. 한 분 한 분 호명하니 그의 생이 스치듯 지나칩니다. 그랬지, 그랬었지.


1. 첫 문장을 곱씹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어느 사람 이름쯤으로 생각했다가 곧 동해안 어느 곳의 작은 도시구나, 그곳이 어디일까, 궁금했습니다. ‘희령’이란 이름/지명이 익숙했던 것 작가 부희령의 기운 탓입니다. 아니 동해에 있는 선배가 생각났습니다.


2. 마지막 문장을 보듬는 일도 덩달아 이어집니다. “할머니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헤아렸습니다. 할머니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리는 지연의 마음까지.


3. 밝은 밤. 오규원 <분명한 사건> 시집에서 읽은 시편 제목 ‘밝은 밤’이 있었습니다. 소설 앞서 시집을 읽었기에 혹시, 그러나 소설 제목과 어떤 연결도 찾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우쭐거리고 싶었는데 객쩍고 맙니다.


4. 소설에서 만난 형용사 ‘옅다’가 내내 맴돌았습니다. 농담(濃淡) 기운 정도로 살폈지만 어떤 나지막한 소리와 바람, 움직임이 깃들었음 직한 생각이 들어 사전을 펼쳤습니다.


: 1. 수면이 밑바닥에 가깝다  2. 생각이나 지식 따위가 깊지 아니하다 3.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아니하다 4. 빛깔이 보통의 정도보다 흐릿하다 5. 안개나 연기 따위가 약간 끼어 있다 6. 액체에 녹아 있는 물질의 양이 보통보다 적다 7. 냄새가 약하다 8. 정도가 깊지 아니하다 9. 소리가 높지 아니하고 작다 10. 연한, 날짜, 시간 따위가 얼마 되지 아니하다


이 정도의 농담, 농도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 사이도 그렇고, 바라봄의 거리도, 들림의 강도도, 흐름의 속도도, 이 정도 옅음에 익숙한 나를 발견합니다.


5. 선배의 간략한 평 “여인들 삶의 서사에서 친구란 어떤 의미고 의지가 되는지,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깊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 어려워지더라. 연대의 끈은 동질감이자 연민.” 그 이름을 잇습니다. 삼천–새비, 영옥-희자, 미선-명희, 지연-지우.


6. 명숙 할머니. 어떤 이유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그분의 목소리가 잔잔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살갑진 않지만 당신의 지켜봄 안에 진심과 정성이 깃들었음을, 영옥에게는 쉽게 잊힌 존재는 아니었을 겁니다. 수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바느질에 자신의 온전함을 담아냈을 그 생애가 궁금했습니다.


7. 편지.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 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8. 지연과 영옥의 우연한 필연의 만남. 영옥은 지연의 모든 것을 알았고, 지연의 모든 것을 감쌌습니다. 그렇게 미선에게 다가선 당신만의 방식, 미선-영옥은 서로 다른 시간을 보냈지만 결코 달랐다고도 할 수 없는, 그랬을 거라는 짐작입니다. 대신 지연-영옥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9. 길미선. 쉽게 속내를 헤아리기 힘든 지연의 어머니이자 영옥의 딸이었습니다. 지연-미선, 미선-영옥 모녀의 갈등에서 애써 화해를 꿈꾸는 일, 그 화해의 자리에 정연과 명희의 약한 연대도 마음 울림이 깊었습니다.


10. 다른 길로 좀 셉니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를 읽고 몇 글자 적었던 부분입니다. “산업노동자 삼대, 산업노동자 이진오, 세월 백여 년이 깊이입니다. 관통하는 시대의 역사, 철길과 기차입니다. 일제 치하, 만주대륙. 남과 북, 동과 서, 남과 여, 주의와 사상, 주의자와 감시자. 대립과 갈등, 역사 발전의 동인인가요.” 황정은 <연년세세年年歲歲>는 어머니와 자매의 지난 삶과 현재에서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관통,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11. 신앙. “희자 어마이,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12. 마음이 잠시, 잠시 마음이 멈췄습니다.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했습니다. 삼천–새비, 영옥-희자, 미선-명희, 지연-지우,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연-미선, 미선-영옥, 그렇게 어깨를 빌려주며 살게 했습니다.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어쩌면,


13.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실린 ‘작가의 말’을 다시 꺼냈습니다. 이 책을 읽던 그때, 아마 나도 이 글귀에 꽤나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시 읽어도, 또다시 읽을 그의 진심입니다. 세상을 진심으로 마주하는 작가가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내 마음이라고, 내 자유랍시고 쓴 글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다. 어떤 글도, 어떤 예술도 사람보다 앞설 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지닌 어떤 무디고 어리석은 점으로 인해 사람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겁이 났다. 나쁜 어른, 나쁜 작가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습니다.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쉽게 아닌 어렵게,


맺습니다. <쇼코의 미소>는 좀 멀었고, <무해한 사람>은 울림이 깊었습니다. <밝은 밤>을 읽고 몇 줄 늘어놓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독후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가의 진심을 헤아렸던 것도 아닌 모자람. 다만 소설 속 등장한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음을, 다시 부를 기회를 건넨 선배에게도 고맙단 인사를 건넵니다.


(2022.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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