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이에게 휴식이 되어 주는 고양이
요즘 가장 핫한 동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고양이가 아닐까 싶다. 길냥이를 잔인하게 죽인 사건이 뉴스기사에 오르내리는 것은 고양이를 사랑하는 애묘족도 늘어났다는 반증이다. 기성세대들에게 아직 고양이는 개만큼 '우리의 친구'로 받아 들여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젊은 싱글족들에게 고양이는 더 할수 없이 매력적인 동반자로 자리잡고 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는 고양이를 주제로 한 계정이 이미 셀 수 없이 많다. 애묘족들은 고양이의 발바닥을 '젤리', 발은 '찹쌀떡'이라고 부르고 고양이의 앉는 자세도 '식빵자세', '호떡자세'라고 애칭을 붙인다. 이러한 젊은 층의 고양이 사랑은 분명 개를 향한 그것보다 소위 '덕후'적이며 '매니아'적이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부터 인간과 함께해 온 고양이가 갑자기 오늘의 한국에서 매니아 팬층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양이가 큰 사랑을 받아왔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일본국민의 성향이 사뿐사뿐 소리없이 다니는 고양이와 일찍부터 잘 맞았던 것은 아닐까?
한국인의 성향은 좀 다르다.
한국인은 좀 더 시끄럽고(?) 흥이 많다.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개가 더 사랑받았다. 애견족이 생겨나던 80년대 후반 90년대 초, 한국은 여전히 경기가 좋았고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자는 파이팅이 넘쳤다. 회사에서 야근을 밥먹듯이 해도 그에 대한 보상이 승진과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었고 가정에서 아들 딸을 잘 교육시키면 나보다는 분명 성공할 것이라고 부모들은 믿었다. 활발하고 충성스러운 개들이 가정에서 애완동물로 사랑받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2016년 오늘 날의 한국사회에서 삼포세대라는 말의 등장은 그러한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 세대의 좌절감을 상징한다. 부모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인문계에 진학하여 서울권 대학을 가려고 치열하게 공부했지만 대학에 와서도 토익점수와 학점을 최고 수준으로 받아야 부모와 자신의 기대에 맞는 회사에 지원서라도 들이밀 수 있다.
노오력하고 자기계발에 힘쓰면
무엇이든 이루게 될 거라고 믿었으나 그 노력은 경기 침체와 두자릿수 청년층 실업률로 좌초되었다. 취업문은 바늘 구멍이 되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는 '스펙' 기준은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부족함을 느끼게 했다. 방향을 바꾸어 사업가 정신으로 도전하기에는 안전망이 부실했다. 오갈데 없이 한 발만 잘못 딛어도 영원한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답답한 현실에 마주했다.
한창 도전해야할 이팔청춘들에게
공무원이 가장 인기있는 불확실의 시대.
누구랄 것도 없이 귀한집 자식으로 자란 젊은이들이 이제 '부모만큼 내 자식에게 해 줄수 있을까'조차 확신할 수 없어졌다.
그야말로 '위로'가 필요한 세대가 되었다.
초등학교부터 삶이 경쟁의 연속이었던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고양이는 쉼표 같은 존재이다.
집에 오면 놀아 달라 보채는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기지개를 켜고 다가와
옆자리에 앉을 뿐이다.
조용히 가끔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고양이 방식이다. 어떤 부담도 주지않고 무리하게 조르지도 않는다.
알고보면 묘생의 80%를 잠으로 보내는 고양이는 여유롭게 우리를 바라보며 '뭘 그렇게 안달복달해. 여유를 가져.'라고 말하는 듯하다. 느긋하게 누워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행인들과 새들을 구경한다. 산책줄을 물고 와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자고 보채는 개와는 달리 고양이는 작은 상자, 한 평 남짓한 방에도 만족하며 살아간다.
저성장 시대, 노오력하다가 지쳐서일까 자수성가가 힘든 사회가 되어서 일까. 지치는 줄 모르고 달려온 우리는 이제 잠시 멈추고 휴식과 만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큰 성공보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요즘. 고양이는 '쉼표동물'로 조용히 우리 옆에서 위로가 되어 준다.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쉬엄 쉬엄 하라고.
'고양이 주제에'말이다.
고양이를 싫어했던 필자가 우연히 고양이를 키우면서 겪은 마음의 힐링을 겪은 그대로 글로 담아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