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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Jun 28. 2020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 이 글에는 「이방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간고사만 끝나면, 대학만 입학하면, 전역만 하면, 한국만 떠나면, 취업만 하면, 주말만 오면..!!

수많은 “~만 하면 행복해질 거야”를 살아내는 동안 정작 행복했던 순간의 비율은 크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기라고 했지만 인생이 원래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즐길 수 없게끔 설계된 건 아닐까요.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 고민하고, 선택하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갈피를 잡고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인가, 그 숙명에 순응하며 살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그려온 스물아홉의 모습이 적어도 아침에는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오후에는 퇴근을 기다리고, 평일에는 주말을 기다리는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버티는 삶, 그렇게 월화수목을 버텨내면 기어코 금토일이 오고야 마는 삶. 퇴근 후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 널브러져 있는 삶. 주말조차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데 에너지를 쓰고,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며 체력을 비축해 두는 삶. 그렇게 해야만 다음 주 일과에 지장이 없는 삶. 분명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던 중, 김영민 교수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만났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정념으로부터 다소나마 풀려날 것이다. 평생 원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명예에 대한 아쉬움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 소소한 근심에 인생을 소진하는 것은, 행성이 충돌하는데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우리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르게 살게 되겠지. 그래, 근심을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6p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죽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거죠. 사실 20대 건장한 청년이 죽음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방인」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이방인」의 1부와 2부를 관통하는 소재도 ‘죽음’입니다. 여기에는 총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자연사’, 주인공인 뫼르소 엄마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태양이 뜨겁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입니다. 세 번째는 그로 인해 본인이 당하게 되는 ‘사형’입니다. 재판을 받으면서도 그는 꿋꿋합니다. 자기 행동에 반성도,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 역시 꽤나 시니컬합니다.


    나는 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곤 했다. 상고기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 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민음사, 김화영 옮김, 126p

   

2년 전에 「이방인」에 관해 썼던 글에서는 정해진 틀에 순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불안정에 대한 불안감이 있겠지만, 그것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다고요. 아쉽게도 2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저는 남미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결국 하고 싶은 일은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까워 우선 돈이라도 벌자는 생각에 취업 준비를 선택했습니다. 운이 좋게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 1년 가까이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우선은 정해진 틀에 아주 잘 순응했네요. 슬프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취업 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것만 같아 여전히 방황 중입니다. 회사일도 실수가 많은데, 회사 밖에서라도 잘할만한 일을 찾겠다고 아등바등. 그런데 정작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찾지 못한 채 아직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틀에 순응하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뫼르소의 마지막 순간은 어땠을까요? 「이방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민음사, 김화영 옮김, 136p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아무런 슬픈 기색도 보이지 않던 도입부와는 정 반대입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세상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마치 졸업을 해봐야 학창 시절이 좋았단 것을 알게 되고, 말년병장이 되어서야 군생활을 돌아보게 되는 것처럼요.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이방인」 작품 해설, 민음사, 213p


“OO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에 또 속아 넘어가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OO를 치열하게 살아가야만 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바른 치열함 일지 아닐지는 뫼르소처럼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쯤 겨우 깨닫겠지요.


저는 「이방인」을 아무리 읽어도 아직 삶과 죽음이 100%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니 김영민 교수님의 말처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으로써 죽음에 대한 사유를 대체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 출근하면 똑같이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 주말을 기다리게 되겠지요. 그래도 출퇴근길에는 잠시 핸드폰을 멀리하고, 책을 읽으려 합니다. 업무 시간에는 주어진 일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재미없고 어려울 수 있지만 우선 최선을 다해 부딪혀 보려 합니다. 퇴근하면 널브러져 있지만 말고 회사일과 상관없는 스페인어 공부도, 글쓰기도 집중해서 해봐야겠습니다. 최선으로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에 하루씩 더 가까워지겠지요.


「이방인」과 같이 읽으면 좋을, 죽음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추천해 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의길, 71p



참고도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민음사)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유시민「어떻게 살 것인가」(생각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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