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1
저의 첫 재판 경험은 군대에서였습니다. 불침번을 서는데 너무 피곤했는지 생활관(내무반)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순찰 중이던 당직 사관님께 딱 걸린 겁니다. 욕설과 함께 저를 깨우는 목소리, “야 이 xx야 미쳤나?”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그저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죠.
며칠 뒤, 징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명백한 제 잘못이고 처벌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래도 그날의 분위기는 잊지 못합니다. 평소 잘 따르던 간부님들로부터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며 신뢰를 잃는 느낌, 쯧쯧 거리는 분위기, 권력 앞에서 갓난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 조금이라도 선처해 주셨으면, 제발 영창만은 안 갔으면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몸을 잔뜩 수그렸습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냐구요? 오늘 소개할 작품하고 관련이 있거든요. 바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입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첫 부분입니다. 상당히 강렬하죠. 이 첫 문장에 압도되어 소설을 보는 내내 주인공 ‘뫼르소’를 사이코패스 취급하며 보게 됩니다. 뫼르소가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장치가 몇 개 있습니다. 먼저, 엄마의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입니다. 이미 입관을 했지만 엄마를 볼 수 있도록 나사못을 뽑아 주겠다는 문지기의 제안을 제지합니다. 엄마의 죽음에 울지도 않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 앞에서 본능에 따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심지어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떠올라 있었다. (..)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기가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옛 직장동료 ‘마리’를 만나 해수욕을 하고 정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또 같은 아파트에 사는 ‘레몽’과 친구가 되는데요. 누구도 레몽과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아요. 자기를 배신한 옛 여자 친구를 마구 패다가 경찰서에 들어가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뫼르소는 별다른 편견 없이 레몽과 친구가 됩니다. ‘그와 말을 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죠. 게다가 레몽이 옛 여친을 괴롭히려는 계획에 동참까지 합니다. ‘내게는 레몽의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며칠 후 뫼르소는 레몽과 해변으로 놀러 갑니다. 거기서 아랍인 일행과 마주치는데, 그중에는 레몽의 전 여자 친구의 오빠도 있었습니다. 소동 끝에 레몽은 칼빵을 맞습니다. 그리고 뫼르소는 답답함을 느끼며 혼자 해변으로 갑니다. 총을 소지한 채.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아랍인을 향해 총을 한 방 쏘고는, 단지 태양이 뜨겁다는 이유로 4방의 총을 더 쏘는 뫼르소를 보며 드는 생각은 “미쳤네”였습니다. 그런데 2부로 들어서니 심경이 조금 바뀝니다. 2부에서는 주인공의 살인죄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는데요. 뫼르소의 감정선을 따라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살인자의 편을 들고 있거든요. 소설 속 검사나 변호사, 판사들의 언변을 보면 「이방인」이 왜 ‘부조리’를 고발한 소설인지 알게 됩니다. 뫼르소는 ‘살인’을 했는데 그의 유죄 판결 이유는 ‘살인’ 자체보다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일상의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오히려 피해자인 ‘아랍인’은 이 재판에서 철저히 잊힙니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다음 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난잡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희극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 가장 수치스러운 정사에 골몰했던 바로 그 사람이 하찮은 이유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정 사건을 정리하려고 살인을 한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고 그는 힘차게 외쳤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다못해 후회하는 빛을 보이기라도 했던가요? 여러분,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피고는 단 한 번도 자기의 가증스러운 범행을 뉘우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는 했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억울한(?) 상황에서 뫼르소의 반응을 보면 “어휴, 이 바보야. 변호사 말 듣고 조금만 잘 꾸며서 말하면 사형은 면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조금만 잘 꾸며 말하는 것’이 바로 암묵적인 질서인데 뫼르소는 이 질서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미국판 서문에서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히 하기 위해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 선고를 받는다.
저는 이 이야기를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질서들에 적용해 봤습니다. 10대 때는 공부를 해서 이름 있는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에 와서는 취직을 위해 스펙을 준비해야 합니다. 남자 기준으로 스물일곱에서 아홉 쯤이면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야 하고요. (서른이 넘으면 기업에서 싫어한다나 뭐라나.) 서른 즈음에는 결혼을 생각해야겠죠. 결혼 후에는 곧 자녀를 가져야 할 거고 자녀를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할 겁니다. 대세를 따르면 간단해집니다. 헌데 여기서 벗어나면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집니다. 뒤쳐져 보이구요. 실패한 인생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해진 굴레에서만 살다 보면 나는 도대체 언제쯤 내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지금, 여기에, 살아 있고, 살아간다는 느낌 없이 그저 대세를 따르기만 한다면 행복한가요?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니 주어진 커리큘럼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 늘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헌데 그 커리큘럼을 벗어나 무언가를 해본 적은 몇 번 없던 것 같아요. 아마도 실패가 두려웠을 겁니다. 정확히는 실패했을 때 사회에서 정해준 ‘표준’의 삶에서 낙방하게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냥 남들 다 하는 대로 하되,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해 좋은 결과를 내 보자. 기왕이면 좀 더 좋은 대학, 학점은 기왕이면 고고익선, 동아리 활동도 최선을 다해서, 취업 준비도 최선을 다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너무 허무했습니다. 겨우 ‘표준’이 되기 위해 그토록 노력을 했던 걸까요.
이런 ‘표준’에 질문을 던져봅니다. 어째서 이 사회는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공무원이 되고 싶도록 설계되어 버린 건가요.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월급 받으며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심은 달콤해서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그 틀을 벗어나는 모든 이에게 보이지 않는 ‘유죄 선고’가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 「이방인」을 읽으며, 그럼에도 저는 정해진 틀에 순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불안정에 대한 불안감은 있겠지만, 그것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어서요. 두려움과 설렘이 1:1로 공존하겠지만요.
(*물론 안정감을 우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그것이 질문 끝에 나온 결론이라면 더더욱.)
작가 알베르 카뮈는 어땠을까요?
<소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카뮈 자신도 그해 10월 시디벨아베스의 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깊이 생각한 끝에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에 비긴다면 어쩌면 생활의 안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져서”, 그리고 “결정적이 되는 것이 두려워” 이를 거절하고 “불확실과 가난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한다. (「작가수첩I」, 103쪽)>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정해진 표준에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그 ‘질문 던지기’의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뫼르소의 살인에 대한 정당화는 불가능합니다. 소설 속에서 아랍인이 먼저 칼을 보이긴 했지만, 카뮈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의 살인이 정당방위였다는 수준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만약 뫼르소를 살인자가 아닌 단순 경범죄자로 설정했다면 「이방인」이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지금만큼 강렬했을까요?
불침번 사건으로 인해 저는 휴가 3일이 짤렸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심문의 내용은 대충 이랬습니다.
“본인의 잘못을 알고는 있나?”
“불침번 초번초로서 경계에 임해야 했음에도 생활관에 들어가 취침을 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가?”
“다음부터는 경계에 더 신중하게 임하겠습니다.”
“어떤 처벌이 나와도 다 받을 수 있겠어?”
“제 잘못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제가 뫼르소의 모습을 보며 “너도 나처럼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지!!”라는 생각이 든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의 잘못도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저와는 다른 스텐스를 취한 뫼르소를 보며 다른 맥락의 교훈을 얻은 셈이죠. 표준에서 벗어날 때 사회가 주는 ‘유죄 판결’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중요한 걸 빠뜨렸는데요. 「이방인」을 관통하는 하나의 소재는 ‘죽음’입니다. 엄마의 죽음, 아랍인 살인, 뫼르소의 사형이지요. 「이방인」의 문학적 정수는 바로 이 ‘죽음’과 ‘태양’을 통해 드러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방인의 후반부를 통해 ‘평범한 20대가 바라본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다 이해하기에는 많은 내공이 필요한 '이방인'입니다. 경험이 부족하여 써놓고도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분은 세상을 향해 어떤 질문을 갖고 계신가요? 다음번 만날 때까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참고도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