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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Nov 15. 2021

민주주의는 강자를 충실히 대변한다

어떤 목소리는 과도하게 대표된다. ‘청년’이 그렇다. 언론에서 말하는 MZ세대, 그러니까 영끌해서 주택을 산다거나 윗 사람에게 할 말 하고 워라밸을 중시하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와 대/공기업 사무직에 취업했거나 그런 곳에 취업을 준비중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엔 목숨 걸고 현장에 나가는 건설노동자 청년도, 보호 사각지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내쳐지는 특성화고 실습생도, 고졸 이하의 학력자들도 없다.


‘성평등’도 마찬가지다. 너무 당연한 권리를 얻기까지 여성은 오랜 시간 투쟁했다. 여성의 권리가 반짝 올라간 시점에는 항상 누가 죽거나 다쳤다. 남초 집단에서 내부고발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성폭행을 폭로해야 했다. 술집 화장실에서 ‘여성이라는’이유로 살해당해야 했다. 아동을 상대로 한 거대 규모의 디지털성폭력 카르텔이 드러나야 했다.


반면 남성의 권리는 굳이 누가 죽지 않아도 민주주의라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올라갔다. 선거에서 남성들의 표심이 떠나면 정치권은 알아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 선거에서 2-30대 남자 표심이 보수당을 향했더니 여야 할것없이 이대남을 잡자며 공약을 쏟아낸다. 모병제, 여성 징병, 여성가족부. 이런 단어들은 그때마다 반짝 소환된다. 반면 4.7 재보궐선거에서 20대 여성이 대안정당 후보들에게 15%의 표를 줬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힌다. 젊은 여성들이 왜 양당에 등을 돌렸는가 주목하는 정치인은 찾기 어렵다.

언론사, 정당과 단체에서는 20대 남성들이 왜 화가 났는지를 너 나 할 것 없이 궁금해한다. 남성의 감정은 여성의 감정보다 더 쉽게 주목되고 더 빨리 해결되는 경향이 있는 것일까.
(권김현영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민주주의가 강자의 입장을 얼마나 충실히 대변하는지가 보인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인식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정치인은 많지만, 왜 여성들이 그런 인식을 갖게 됐는가 하는 구조적 문제를 들쑤시는 정치인은 없다.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는 목소리가 무섭다. 역차별 운운하는 소리는 솔직히 역겹다. 그만하면 된 것은 없다. 여성 연예인은 밤 늦게 귀가하는 것이 무섭다고 밝히는 것만으로 논란이 된다. 여성운동선수는 숏컷을 했다는 이유로 금메달을 내리 따내도 욕을 먹는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커뮤니티발이긴 하지만..) N번방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악마들이 감옥에 들어간 것 말고 바뀐 것이 없다. 텔레그램을 피해 다른 매체로 옮겨갔을 뿐이다.

이번 대선을 두고 스트롱맨들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진짜 스트롱맨은 어떤 사람인가.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난민 유입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우려하는 국민들을 향해 말했다. “겁먹지 마세요. 독일은 강력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대선 후보는 으레 예능에 출연해 편안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우리 현실에서 메르켈은 너무 막연한 기대일까.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추종자를 어린이로 만들기 위해 열을 올린다”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말이다. 울며 떼 쓰는 이들에게 사탕을 쥐어주는 일은 그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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