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림을 소개하고플 때 가장 곤란한 상황이 작가나 그림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다. 「진주」, 혹은 「우는 사람」이라 불리는 그림을 만났을 때 말문이 막혔다. “형언(形言)할 수 없다.”라는 말은 이런 그림을 두고 쓰는 것이다.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특별히 우리나라에는 서경식 선생이 『디아스포라 기행』이나 『고뇌의 원근법』 등의 책에서 자신을 비유하여 소개함으로 알려진 작가다.「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같은 대표작은 이미 유명하지만 여기 「우는 사람」은 나 같은 그림 덕후에게도 낯선 그림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에서도 고화질 이미지나 작품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유화로 그린 것이 맞는지, 크기는 얼마큼인지,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는 사람」을 담대히 소개하는 것은 그림이 내뿜는 감정 때문이다.
짙고 검은 어둠 가운데 여자와 아이가 함께 있다. 눈동자는 확대되어 강조된다. 너무 울어서 눈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여자의 벌린 입도 검고 깊기 그지없다. 몸 안에 어둠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진주가 되어 알알이 맺히고 목에 걸린다. 이 여자가 왜 이리 우는가, 검디검은 배경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배경 왼쪽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빽빽한 십자가 묘비가 보인다. 전쟁이다. 전쟁인 것이다. 전쟁이 이 여자를 울게 하는 것이다. 슬픔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아이를 껴안고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내게 하는 것이다. 무거운 가슴과 무거운 눈물이 여자를 주저앉게 한다. 그림은 여자와 아이의 얼굴만 보여주고 있지만 여자는 분명 주저앉아 있을 것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이 바닥에 까부라져 있을 것이다.
왜 눈물이고 왜 진주인가, 모든 보석에는 의미가 있다. 진주는 그중에서도 ‘눈물의 씨앗’이라는 뜻을 가진다. 조개가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려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래서 진주 선물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역으로 생각한다면, 눈물은 진주만큼 귀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가졌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눈물이라면 묵직한 눈물이리라.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라는 신철규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아픔이 깊어서 무거운, 두 손으로 받들어야 하는 눈물을 생각한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너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_신철규, 「눈물의 중력」 (일부)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누스바움의 「우는 사람」을 보며 신철규의 「눈물의 중력」을 떠올렸고, 「눈물의 중력」을 읽으며 「수용소에서」를 떠올렸다. 시는 언어로 된 간결한 이미지다. 시가 이미지를 부르고 이미지는 또 시를 부른다. 너무 무거운 눈물 때문에 엎드려 울고 있는 한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 유대인이었던 화가는 보호해 줄 나라가 없어 생시프리엥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도망친 전력이 있었다. 화가 자신과도 같은 이 남자는 얼마나 오래 울고 있었을까. 저 뒤에 보이는 비참한 사람들을 보라. 누가 이 남자를 도울 수 있겠는가. 무거운 눈물을 두 손으로 받다가 곧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수용소의 일상은 비참 그 자체였다. 인간의 존엄은 보호되지 않았다. 그림의 뒤쪽에서도 확연히 보인다. 매일은 아비규환, 오로지 생존뿐이었다.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받드는 이 남자도 언제 진흙탕에 나뒹굴고 싸울지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고 자고 배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 1904~1944의 그림을 무엇으로 분류해야 할까, 초현실주의일까 표현주의일까, 독일 출신의 화가이므로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속할 수 없이 화가의 그림은 독보적이다. 그만이 겪을 수 있는 삶을 그만이 그릴 수 있는 절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화가는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대형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아들에게 무엇이든 지원해 주었다. 의외로 그림을 그리는 데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부친은 이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애국인이었다. 완벽히 동화된 유대인, 그것이 아마 아버지 필립 누스바움이었으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화가의 인생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이미 스물도 되기 전에 함부르크와 베를린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누스바움에게 무엇이 어려워 보였겠는가. 그저 그림만 그리고 꾸준히 살아가면 될 것 같았다.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그림에 관심을 가진다. 고흐가 가졌던 색채 감각과 루소가 가졌던 현실 초월의 이미지, 키리코가 가졌던 형이상학적이고 이세계적인 공간 감각이 화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장기에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다. 누스바움은 한때 자기가 독일인이며 유태인이라는 이중 현실에 혼란을 느꼈다. 아버지는 독일인이 되기 위해 충성했고 독일인처럼 살아갔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누스바움의 삶은 누스바움이 선택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독일인인 척’하며 살 수 없었다. 화가의 이십 대는 이것과의 싸움이었다. 그림마다 이 고민이 가득했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 이산’를 주제로 평생을 탐구했던 서경식이 펠릭스 누스바움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1929년, 펠릭스 누스바움은 같은 미술학교를 다니던 펠카 플라테크Felka Platek, 1899~1944과 함께 화실을 꾸린다. 처음에는 함께 스튜디오를 차렸으나 다음에는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함께 일생을 보내게 된다. 1932년, 화가 커플은 독일 예술 아카데미의 장학금으로 로마 유학을 떠난다. 어쩌면 하늘이 도왔는지도 모른다. 얼마 되지 않아 나치스와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고 유대인을 탄압한다. 로마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파시스트와 무솔리니가 언제 돌변할지 몰랐다. 경제공황 중인 유럽에서 그 어떤 나라도 난민에게 호의적일 리 없다. 누스바움 부부는 나라 없이 평생을 떠돌아야 했다.
1935년, 여기저기 떠돌던 누스바움 부부가 벨기에에 정착한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계 난민을 받아주는 것은 그나마 그곳뿐이었다. 겨우 한시름 놓은 두 사람은 1937년, 브뤼셀에서 법적인 절차를 밟아 정식 부부가 된다. 하루하루 불안한 인생일지언정 죽는 날까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나치스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독일 국민들이 옳은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타자화된 소수자를 탄압하도록 선동했다. 유럽으로 침공한 나치스 때문에 벨기에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독일 여권을 가진 15세 이상 남자들은 ‘적대적 외국인hostile alien’이란 명목으로 모두 포로수용소에 가야 했다. 프랑스 생시프리엥Saint-Cyprien 수용소가 「수용소에서」 의 배경이 된 그곳이다. 20일가량의 아주 짧은 시간, 프랑스-독일과의 휴전 협정으로 혼란한 가운데 펠릭스는 독일 송환 열차를 탈출하여 아내에게로 돌아간다.
벨기에는 나치스의 소유가 되었다. 어쩌면 누스바움이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즈음이 아닐까. 1940년 10월은 유태인 등록령이 발표된 날이다. 1941년에는 유대인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한다. 이제 유대인은 점령되고 관리되는 요주의 인종일 뿐이다. 1942년에는 유대인 사냥이 본격화되었다. 잡히기만 하면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가득했다. 공포에 떠는 누스바움 부부에게 벨기에인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은신처를 만들어주고 돌보아 주는 친구 덕에 누스바움은 조금씩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 가운데 홀로코스트를 그려 증언하는 용사가 그였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멀리서 한눈에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좁은 방에서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나 소중한 그림, 그러나 아무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림이어서 더 간절했다. 화가는 무엇을 예감한 것인가. 1942년, 그는 믿을 수 있는 치과의사 그로스필스에게 그림을 맡긴다. “나는 죽더라도 나의 작품만큼은 죽게 하지 말아달라.”라는 말과 함께였다.
1944년 7월, 해방의 날을 두 달 앞두고 펠릭스 누스바움 부부는 ‘유대인 사냥’에 걸려든다. 부부가 간신히 은거하고 있던 지붕과 천장 사이의 작은 공간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그들이 탄 것은 마지막 벨기에-폴란드 아우슈비츠행 열차였다. 패색을 보고 있는 독일군은 다급했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단지 일주일 만에 부부는 학살된다. 남은 것은 그림뿐이었다. 1970년, 화가가 남겼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다. 친척인 구스텔 모제스 누스바움Gustl Moses-Nussbaum의 노력 덕분이었다. 내내 다락방과 지하실에 갇혀 있던 화가의 그림은 드디어 빛을 보았다. 그림이 전시되는 도시마다 눈물을 흘렸다. 홀로코스트를 살며 홀로코스트를 그림으로 증언한 화가는 독보적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의 갈망을 담은 화가의 작품은 감동뿐이었다. 화가의 삶은 한 장 한 장 모두 감동이었다.
훌륭한 그림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훌륭한 글에도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다. 참 이상하다. 왜 우리가 감동을 느끼는 작품에는 고통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가. 예술은 작가 그 자체이고 예술이 마땅히 할 일은 위안이기 때문이다. 생이 고단한 이에게는 무엇이든 예술이 절실하다. 신철규의 시도 누스바움의 그림도 나에게 꼭 맞게 절실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당신, 눈물을 두 손으로 모으는 당신이라면 깊이 이해하리라.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라는 시인의 말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같은 울음을 울어본 당신은 함께 무너지리라. 자기 몫의 슬픔을 가지고, 너무 무거운 눈물을 받들며 이 자리에 엎드리리라. 펠릭스 누스바움의 그림처럼, 당신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